범죄인은 수사기관에 뭔가 걸렸다 싶으면 일단 해외로 도망가려 한다. 잡범이든 재력가든 고위 공직자든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쫓기듯 나간 그 끝이 좋을 리 없다. 1994년 수억원대 마약 밀수 범죄를 저지르고 해외로 도피했던 사람이 지난해 붙잡혔다. 도피 21년 만이다. 주차장 종업원을 전전하다가 살기 팍팍해 말레이시아 주재 한국 대사관을 제 발로 찾아갔다고 한다. 예순아홉 나이였다.

▶2007년 해외로 도피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9년째 숨어 지내고 있다. 그는 수사기관 추적을 피하려고 지역을 옮겨 다녔다. 키르기스스탄에서 금광 사업을 하며 재기를 모색한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한때 어디에 있는지 꼬리가 잡혀 법무부가 범죄인 인도 청구를 한 적도 있다. 그의 나이 아흔셋, 도피 생활을 이어가긴 힘들 것이다.

▶해외 도피 사범에 대해 정부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범죄인 인도 청구를 하거나 여권 무효화 조치를 해서 강제 추방토록 하는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해당국에 범죄인 인도 청구를 해서 재판을 하면 몇 년씩 걸릴 수 있다.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장녀 유섬나씨는 2년 전 프랑스에서 체포됐지만 아직도 범죄인 인도 재판을 받고 있다. 그나마 소재가 파악됐을 때 얘기이고, 위조 여권을 들고 숨어 다니면 잡을 방법이 막막해진다.

▶해외 도피 사범이 2만명에 이른다는 중국은 이들을 잡으려고 아예 '작전'을 한다. 작전명은 '여우 사냥'. 4인 1조로 구성된 정보·수사 전문가들이 여러 나라에 직접 들어가 '숨은 여우'를 찾아낸다. 2014년 이후 최근까지 71국에 50여 실무팀을 파견해 부패 관료와 기업인 1657명을 압송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는 외교적 문제가 되기도 한다. 미국 정부는 미국 영토 내에서 중국 정보 요원의 불법 활동을 중지하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검찰이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 수사에 착수했지만 핵심 인물이 해외에 있어 수사가 제대로 되겠느냐는 말이 나온다. 최순실씨와 딸 정유라씨는 유럽에, 문화계 황태자라는 차은택씨는 중국에 있다. 차씨는 언론에 "조사에 응하겠다"고 했다지만 실제 그럴지는 미지수다. 최씨 모녀는 행적을 감췄다. 이 사건 수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검찰이 대통령이 수사를 '허가'한 때문인지 검사를 늘리고 있다고 한다. 시중엔 최·차씨가 해외 도피하고 나니까 수사하겠다는 것이냐는 빈축이 나온다. 대통령이 "최씨를 귀국시켜 조사하라"고 검찰에 지시하지 않는 한 상황이 달라질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