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평생 경제만 다루어 온 필자가 문화 융성에 관심을 두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기술적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제품을 만드는 우리지만 뭔가가 부족해서 선진국만큼 비싼 값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때가 잦은데, 이유는 바로 문화의 후광효과(일부 특정 요소가 전체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현상)이다.

독일·일본이라는 나라의 문화적 배경이 느끼게 하는 신뢰감, 프랑스·이탈리아 제품이 자아내는 선망·동경 같은 것이 아직 우리에게는 부족하다. 문화·예술 그 자체도 훌륭한 산업이지만 모든 산업에 미치는 후광효과 때문에 이제 문화예술의 진흥은 경제적으로도 절실한 정책 과제가 된 것이다.

국가 예산으로 또는 문예진흥기금, 영화진흥기금 등 공공자금의 지원으로 문화 강국을 이룰 수 있을까? 오늘날 한국 영화가 미국 못지않게 경쟁력이 있는 수준으로 발돋움한 데에는 스크린쿼터 감축과 함께 강화한 영화진흥기금이 크게 기여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이런 공공 재원으로 문화·예술을 진흥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예컨대 문예진흥기금의 올해 사업비가 2150억원이지만 저소득층 153만명에게 1인당 연간 5만원씩 쓸 수 있는 카드를 나누어 주는 등 소외 계층 문화 향수 기회 확대 사업에 900억원 이상을 쓰고 나면 좁은 의미의 문예 진흥을 위해서 쓸 수 있는 돈은 1200억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국민 한 사람당 한 해에 1만원씩만 더 문화·예술 소비 지출에 쓰게 할 수만 있다면 그 금액은 5000억원이다. 문화 융성도 나라 예산이 아니라 개개인의 소비 지출 확대에 의해서 하는 것이 정도(正道)이자 몇 배 효과적인 방법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김영란법이란?]

정부는 흔히 내수 진작을 내세워 자동차나 고급 가전제품, 그리고 부동산에 대한 세제 감면 조치를 한다. 이 업종들에서 무슨 로비를 받은 것도 아닌데 매번 습관처럼 그렇게 한다. 그런데 이런 한시적인 세제 감면의 경우 자동차나 고급 가전제품의 수요 그 자체를 늘리는 효과는 거의 없고 미래의 수요를 앞당겨 빼먹는 효과가 대부분이다. 부동산·주택 수요를 늘리겠다고 세제 감면, 이자 경감을 해주는 것도 투기와 자산 버블을 일으킬 위험성이 너무 크다는 점에서 장려하기 어렵다.

차라리 개인과 법인의 문화·예술 소비 지출에 지속적으로 세제 혜택을 주는 것이 순(純)수요 진작 효과가 더 클 것이다. 자동차 회사, 가전 회사, 건설사 등에 흘러들어 간 돈은 얼마나 다시 다음 소비로 연결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가난한 예술가들의 주머니로 돈이 흘러들어 간다면 즉시 그보다 많은 돈을 쓰게 될 가능성이 크니 수요 진작 효과가 훨씬 클 것이다. 경제학 용어로 말하자면 한계소비성향(추가 소득 중 저축하지 않고 소비하는 금액의 비율)이 100이 넘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청탁금지법(김영란법)의 획일적 적용도 재고되어야 한다. 필자는 오랫동안 지인들의 인사 이동이나 명절 때 선물로 난 화분이나 농산물보다(농민들께 대단히 죄송하다!) 책이나 판화를 많이 써 왔는데 이것이 어려워질 것 같다. 문화·예술 접대나 선물에 대해 한도 상향 조정 등의 조치가 없으면 가뜩이나 부족한 수요가 더 위축될 우려가 크다. 기업이 공연에 후원하고 일부 표를 받으면 지금까지는 대부분 공직자·교사 등에게 나누어 줬는데 이걸 못하게 되면 앞으로는 기업의 후원을 받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우선 급한 대로 기업들이 이런 입장권을 직원들 격려·포상용으로 또는 직원들의 문화 역량 제고를 위한 용도로 지금까지와 같은 수준의 후원을 계속해 주도록 거국적인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할 것 같다.

더욱 중요한 문화·예술 수요 진작책은 문화·예술 애호가와 수요자의 육성이다. 이를 위해 학교에서 음악·미술 교육을 문화·예술 향수 능력을 키워주는 감상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 예체능 실기 교육은 아무래도 문화·예술·체육의 공급자를 키워내는 데에 더 필요할 것이다. 특히 예체능 실기를 학생부에 반영되는 평가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 분야에 소질이 없는 아이들에겐 음악·미술에 대해 혐오감만 키워 줄 수도 있다. 우리 교육이 1년에 시집 한 권이라도 사고, 판화 한 장이라도 사는 국민을 키워내지 못한다면 문화 융성은 연목구어(緣木求魚)가 될 것이다.

문화·예술 수요 진작을 위해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문화·예술인뿐만 아니라 그들의 산물을 소비자들에게 팔아서 돈을 만들어 주는 화랑·공연기획사·극장·출판사·서점·영화관 경영자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들을 문화·예술인과 동등하게 우대하고 육성하는 일이다. 이들이 위축되어서는 수요 진작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