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검이 롯데 신동빈(61·사진) 회장에 대해 청구한 구속영장이 29일 새벽 기각됐다. 검찰이 지난 6월 10일 검사와 수사관 240여명을 동원해 롯데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 수색에 나선 지 112일 만이다. 검찰은 신 회장을 구속한 뒤 추가로 롯데 수사를 계속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룹 총수의 구속이라는 관문(關門)을 넘어서지 못하면서 향후 수사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검찰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이날 오후 기자간담회에서 "신 회장의 범죄 사실이 충분히 입증됐고 사안이 무거운데도 영장이 기각된 데 대해 매우 유감"이라며 법원의 영장 기각에 대한 불만을 내비쳤다. 검찰은 "이번 기각 결정은 다른 재벌 수사와 비교해 형평성에 반(反)하고 총수는 비리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며 "면밀한 검토를 거쳐 영장 재청구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신동빈 영장 기각, 네 가지 사유

하지만 법원이 밝힌 영장 기각 사유 등을 볼 때 검찰 수사팀이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분석이 법조계에서 나오고 있다. 신 회장에 대한 영장실질심사를 담당한 조의연 부장판사는 "현재까지 수사 진행 내용과 경과, 주요 범죄 혐의에 대한 법리상 다툼의 여지 등을 고려할 때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영장 기각 사유를 밝혔다. 법률 용어를 위주로 한 짤막한 문장이지만 실제 담겨 있는 의미는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이 법률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조 판사가 제시한 영장 기각 사유는 ①범죄 혐의에 법리적 다툼 여지가 있다 ②구속 사유가 없다 ③구속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④구속의 상당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등 4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여기서 '혐의에 대한 법리적 다툼'과 '구속의 상당성'이라는 대목은 검찰 수사 내용과 직결되는 부분이다. 검찰은 신 회장이 친형인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 등의 급여 명목으로 500억원을 주도록 해 회사 자금을 횡령했고, 총수 일가가 세운 개인 회사에 일감을 몰아주거나 계열사 주식 거래를 지시해 1250억원가량의 손실을 끼친 혐의(배임)가 있다며 영장을 청구했다. 그러나 500억원 횡령 혐의의 경우 그 돈을 받은 수혜자가 신 회장 자신이 아니어서 처벌이 가능하냐는 논란이 있었다. 또 1250억원 배임 혐의는 신 회장이 아니라 신격호 총괄회장이 결정하고 지시한 일이라는 게 롯데 측의 입장이었다.

[신동빈 "미흡한 부분 고치겠다"]

조 판사는 사실상 신 회장과 롯데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신 회장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 맞느냐고 의문을 표시한 것이다. 법조계에선 조 판사가 재벌 총수인 신 회장이 도주할 우려가 없고, 다른 계열사 관계자 등에 대한 조사가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증거를 인멸할 가능성도 크지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롯데 수사와 관련해선 지금까지 신 회장을 포함해 390여 명의 그룹 관계자가 720여 차례에 걸쳐 조사를 받았으며, 신 회장의 자택과 사무실 등을 포함해 압수 수색도 6~7차례 진행됐다. 조 판사가 '구속 사유가 없다'고 한 것은 이 같은 판단에 따른 것으로 법조계는 보고 있다.

◇수사의 그림이 달라졌다

6월 10일 압수 수색 당시 검찰 관계자는 "3000억원대 비자금 조성과 계열사 간 자산(資産) 거래를 통한 배임 혐의가 있다"고 했다. 수사팀 관계자들은 "여러 달에 걸쳐 충분하게 내사(內査)를 했다"거나 "속전속결로 수사를 끝내 취재하는 기자들도 여름휴가를 갈 수 있게 할 것"이라고 했다. 한 검찰 관계자는 "(수사 장기화로 비판받은) 포스코 수사와는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수사는 검찰 관계자들의 말과 달랐다. 검찰은 수사 초기 "신격호 총괄회장의 집무실 비밀 금고에서 현금 30억원을 찾아냈고, 숨겨뒀던 비밀 장부도 발견했다"고 공개했다. '롯데 비자금의 실체'에 다가섰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검찰은 이 돈이 신 총괄회장과 신동빈 회장이 계열사들에서 받은 급여와 배당금이라는 롯데 측의 해명을 깨뜨리지 못했다.

검찰은 롯데케미칼이 허위 장부 등으로 소송을 통해 270억원가량의 세금을 부당하게 환급받고, 200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에 대해 수사 중이라고도 밝혔다. 하지만 검찰은 이 부분 역시 신 회장의 구속영장 혐의에 포함시키지 못했다.

'총수 비자금' 수사가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검찰은 계열사 비자금 수사로 방향을 틀었다. 검찰은 롯데건설이 2002년부터 2012년까지 10년간 조성한 500여억원의 비자금 조성 혐의를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같은 비자금 가운데 상당 부분은 2002년 대선을 전후해 조성된 비자금이며, 공소시효가 지나서 처벌하기 쉽지 않다는 말이 검찰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검찰은 '계열사 비자금'과 관련해 "롯데 관계자들로부터 신 회장이 지시했다는 진술은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검찰은 신격호 총괄회장이 2006년 무렵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씨와 서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신유미씨, 장녀인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에게 일본 롯데홀딩스 지분 6.2%를 증여하는 과정에서 1100억원대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를 밝혀내 최근 기소했다. 검찰은 이를 이번 수사의 주요 성과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다.

◇검찰, 계속 수사하겠다지만…

검찰은 그동안 신 회장 등 롯데 핵심 관계자 9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이 중 3분의 2인 6명에 대한 영장은 기각되고 신영자 이사장 등 3명만 영장이 발부됐다. 신 이사장을 제외하면 롯데의 현직 사장급 이상 임원 가운데 구속된 사람은 없는 상황이다. 검찰 내에서조차 "서울중앙지검의 3개 부서 검사 전원이 4개월간 매달린 수사치고는 너무도 초라한 결과"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법조계에선 신 회장 영장 기각을 계기로 롯데 수사가 마무리 국면으로 접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