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작가 올라퍼 엘리아슨(49)이 에티오피아에서 입양한 열 살배기 딸 알마 손을 꼭 잡고 미술관에 들어섰다. "아빠 스튜디오에서 본 작품이잖아. 휴, 또 예술이네." 툴툴대는 꼬마 아가씨 곁에서 아빠는 푸념한다. "교육상 데려왔더니 '강남(스타일)' 얘기만 하네요. 그래도 국립민속박물관에 데려갈 거예요."

'딸 바보' 아빠는 학교 가느라 스마트폰 보느라 별(星) 볼 일 없는 요즘 아이들을 위해 검은 바탕에 유리구슬 1000여 개를 붙여 반짝반짝 빛나는 밤하늘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당신의 예측 불가능한 여정'이란 작품을 비롯해 그의 대표작 22점이 한국 관객을 찾아왔다. 28일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그의 대규모 개인전 '세상의 모든 가능성'이 시작했다.

“각도에 따라 자기 모습이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하죠? 예술을 보는 눈도 이렇게 다양합니다.”삼각형 거울 조각을 입체적으로 붙여 만화경처럼 만든 작품‘자아가 사라지는 벽’앞에서 올라퍼 엘리아슨이 말했다.

엘리아슨은 세계 곳곳에 '유사(類似) 자연'을 심어 명성을 얻은 작가다.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 터빈 홀에 노란 조명으로 인공 태양(2003년)을 걸었고, 미국 뉴욕 이스트강(2008년)과 파리 베르사유 궁(2016년)에 인공 폭포를 만들었다. 아이슬란드 출신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엔 태고의 자연이 숨 쉬는 아이슬란드 풍광이 스며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후각'이 '시각'에 앞서 관객을 마중 나온다. 거대한 벽면(폭 13.9m, 높이 6m) 가득 붙은 아이슬란드 순록 이끼('이끼 벽')가 풍기는 눅눅한 내음이다. 그 앞에 리듬 체조 리본처럼 휘감겨 돌아가는 나선형 구조물 한 쌍이 있다. 나선이 많이 감긴 쪽이 '강한(power) 나선', 덜 휘감긴 쪽이 '부드러운(care) 나선'이라 이름 붙은 이 작품엔 작가가 생각하는 '참된 권력'의 정의가 내포돼 있다. 그는 "'파워'를 '남성적 권력' '강한 리더십'과 동의어로 받아들이는 건 잘못"이라며 "'배려' '돌봄'(care) 같은 부드러움을 강조함으로써 권력이 더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담았다"고 했다.

권력이란 주제는 대표작 '리틀 선(Little sun)'에서도 볼 수 있다. 리틀 선은 태양열로 충전해 쓸 수 있는 작은 해바라기 모양 조명으로 전력이 부족한 국가의 아이들에게 보급하고 있다. 그는 "영어 단어 파워는 '전력'이면서 '권력'이다. 손 안에 파워를 주는 건 '권력 분산'을 의미하기도 한다"며 "얼마 전 만난 달라이 라마도 현대 예술엔 문외한이었지만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관심을 보였다"고 했다. 작가는 '리틀 선'의 전시장은 '기념품 숍'이라고 직접 설명했다. 로비에 있는 기념품 숍에 가면 4만원으로 '권력 분산'과 '작품 소장'의 소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수증기처럼 뿜어진 물방울에 조명을 비춰 만든 작품‘무지개 집합’. 보는 각도에 따라 무지개가 보이다 사라졌다 한다.

[아이슬란드는 어떤 나라?]

오로라를 연상시키는 '무지개 집합(Rainbow assembly)'은 이번 전시에 던지는 작가의 메시지가 응축된 작품이다. 천장에서 보슬비처럼 부슬부슬 뿜어진 물방울이 조명에 비치면서 무지개 폭포가 연출된다.

"무지개는 빛, 물, 눈이 특정한 각도를 이뤘을 때 보이지만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보일 수도 안 보일 수도 있어요. 한 작품 앞에서도 다양한 시선,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거죠. 민주주의 의회(assembly)처럼. 이게 오늘날 미술관의 역할이라 봅니다." 이 점에서 서울이란 공간은 특별하다. "한국은 현대미술 전통이 짧은 나라입니다. 그만큼 신선하고 다양한 시선이 존재해서 흥미로워요." 기계가 자아낸 무지개 앞에서 그는 "내 작품에서 관람객들은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이자 작가이고, 나는 기계 제작자일 뿐"이라고 했다. "제 의도를 심오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강박은 버리세요. 당신이 느끼는 감정이 바로 예술이니까."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 갖는 이유를 묻자 부모님 얘기를 꺼냈다. "어렸을 적 그림 그릴 때면 부모님이 말씀하셨어요. '얘야, 네가 작은 손으로 지구를 밀고 있구나!' 그림 그리는 행위가 그림 밖 우리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신 거죠." 내년 2월 26일까지. (02)2014-6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