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희 논설위원

북핵 때문에 머리 위가 뒤숭숭하다. 지진 때문에 발밑도 뒤숭숭하다. 그보다 더 뒤숭숭한 건 우리 사회 돌아가는 걸 지켜보는 국민 마음속일 것 같다. 사회 각 부분에서 변화와 혼란과 소음이 뒤섞이는데 과연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희망적 진통인 건지, 무질서와 무능력의 절망적 도돌이표인 건지, 확신이 잘 서질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 요 며칠 뉴스만 봐도 그렇다. 장관 해임건의안으로 힘 과시에 나선 야당에, 무기한 단식 투쟁으로 맞선 여당 대표, 세종시에서 우르르 상경해 파행 겪는 국감장 밖에서 하염없이 대기 중인 공무원들을 보면서 국민들이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와글와글 일해야 할 나라 한편은 개점 휴업 중인데, 다른 한편에선 조용조용 환부만 실력 있게 도려내야 할 사정 당국이 고약한 군기반장처럼 벌집 쑤시듯 재벌 수사를 해 가뜩이나 힘든 경제계를 조바심치게 만든다.

그 어느 때라고 대한민국 역사에 중요하지 않은 시기는 없었겠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재임하는 시기의 시대적 소명은 특히나 분명해 보인다. 대북 문제나 외교 같은 밖의 변수는 접어두고, 안으로 시선을 고정하면 박 대통령 임기는 경제·사회 체질을 바꿔야 하는 개혁과 구조조정의 마지막 골든 타임과 겹친다. 청장년처럼 달려온 한국 사회가 2018년이면 65세 인구가 전체의 14%를 넘는 고령 사회가 돼 개혁이 더더욱 힘든 사회가 된다. 이때부터는 인구가 줄어 경제 성장에서 인구 덕을 보던 '인구 보너스' 시대가 막 내린다. 일할 청년은 줄고, 먹여 살려야 하는 고령 인구는 늘어나 나라 곳간 채우기도 더 힘들어진다. 채 회복되지 못한 글로벌 금융 위기의 그림자는 10년 가까이 드리워져 한국 경제를 탈진시키고 있다. 고도성장 시절 몸에 익은 경제 문법을 확 바꾸고, 누적된 비효율과 부실을 걷어내는 개혁과 구조조정을 통해 우리 사회에 공정한 경쟁과 지속 가능한 성장의 원칙을 심는 진통이라면 그래도 희망은 있다.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 이미지가 강한 박 대통령은 이런 시대적 소임에 맞는 캐릭터다. 나라 걱정하는 애국심도 남다르다. 그런데도 어째 국정은 소란스럽기만 하고, 성과는 잘 나타나지 않으며, 국민들 걱정과 피로도만 높아지는 것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 첫째로 "원칙대로"란 소신이 꽃을 피우려면 그 원칙은 사회 전체에 골고루, 그리고 투명하게 적용돼야 한다. 가령 박근혜 정부가 추진해온 4대 개혁과제 가운데 공공기관에 성과연봉제를 도입하는 공공개혁은 열심히 일해서 성과 낸 사람한테 월급 더 주고, 동료에게 무임승차하는 사람한테는 월급을 덜 주는 게 공정하다는 원칙을 심는 일이다. 정부가 노조 반대를 무릅쓰고 성과연봉제를 도입하려면, 공공기관의 높은 자리에 깜도 안 되는 인물을 마구 앉히는 낙하산 인사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 전문성 없는 인사를 고위직에 어물쩡 밀어넣어 놓고, 그 아랫사람들을 능력대로 평가하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K스포츠재단이나 미르재단처럼 취지는 좋았을지 모르나 수십년 전 껌껌한 시절을 연상케 하는 불투명한 일처리로 공연한 의혹을 산다면 대통령이 누구보다 노발대발해서 주변을 둘러보고 속속들이 국민들에게 오해를 풀어주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중요한 것이 정부의 실력, 즉 프로페셔널리즘이 성패를 가른다. 우리 사회의 관행을 바꾸는 개혁과 구조조정은 '경제적 수술'이요, '사회적 지진'이나 다름없다. 지진도 대피 방법을 알면 피해를 줄이듯, 개혁과 구조조정도 파생되는 후유증을 신속하고 매끈하게 처리할 수 있는 공무원들의 전문성과 부처 간 협업이 단단히 뒷받침되어야만 충격과 비용을 줄인다. 한진해운 법정관리로 인한 물류 대란이 수습 국면에 접어들었다고는 하나, 한 달이 다 되도록 바다 위에 떠 있는 선원들 사진을 보면 기막히고 처량하기 그지없다. 해운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어쨌든 정부는 '대마불사' 관행을 깨고 구조조정 원칙을 지켰다고 자평할지 모르나, 물류 대란을 수습할 준비가 부족해 아마추어처럼 우왕좌왕했다.

마키아벨리로부터 시작돼 막스 베버로 이어지는 서구 현실주의 정치 사상에서는 정치 윤리를 개인 윤리 차원의 선악과 구분 짓는다. 개인 윤리에서는 좋은 의도라면 설사 예기치 않게 나쁜 결과를 가져왔어도 '정상 참작'이 된다. 하지만 정치 윤리는 좋은 의도만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게 아니다. 좋은 의도였어도 이를 실행에 옮기는 실력이 부족해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건 미덕이 아니라 악덕으로 여겨진다. 정치는 국민 전체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엊그제 "과감한 혁신과 구조조정을 통해 모든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단합하면 그 어떤 문제도 능히 해결해나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국민이 한뜻으로 단합하지 못하고 불안해 하는 건 원칙도 제각각, 원칙을 관철하는 능력도 어설퍼 흡사 지진 나는 땅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현기증을 느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