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익 논설위원

지난주 서울 가양동 한강가에 있는 '양천 관아 터'를 다녀왔다. 양천(陽川)은 조선시대 진경산수 대가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말년에 현감을 지낸 곳이다. 얼마 전 읽은 논문의 한 구절이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 논문에는 "겸재가 양천 현감으로 있던 69세 때 경기 감영에 끌려가 곤장을 맞았다"(강관식 '겸재 정선의 사환 경력과 애환')고 돼 있었다. 환곡(還穀) 회수 실적이 경기도 지방 수령 중 최하위여서였다고 했다. 겸재가 곤장을? 그것도 지금 수명으로 보면 여든은 훌쩍 넘겼을 것 같은 나이에? 문득 그가 감영에 끌려가면서 느꼈을 두려움과 모멸감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세속의 희로애락과 정신의 지향 사이에서 힘든 줄타기를 하며 위대한 예술을 낳은 겸재라는 인간의 그릇을 생각했다.

양천 관아는 흔적도 없었다. 동헌이며 객사 같은 것이 있던 자리는 연립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찼다. 곁에 세워진 겸재정선미술관이 대신 겸재의 자취를 전하고 있다. 복원된 양천 향교 앞에는 이 지역을 다스렸던 여러 현감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서 있다. 그래도 역사는 그들을 잊고 겸재의 이름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예술은 길다고 하는 것인가.

돈과 지위와 명예는 누구나 갖는 꿈이다. 겸재도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은 원한다고 다 주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누리는 것은 그럴 만한 함량이 되는 사람만 가능하다. 겸재는 여든넷까지 살았으니 천수를 다했다. 40년 관직 생활을 하며 종2품 벼슬까지 올랐으니 화가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벼슬을 했고, 가장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다. 당시 서울의 최고 주택가인 인왕산 자락에 널따란 집을 마련할 정도로 돈도 만졌다. 겸재의 가장 큰 성공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술에서의 업적이다. 그는 가장 많은 걸작을 후세에 남겨 '화성(�聖)'이라 불린다.

몰락한 사대부 가문 출신인 겸재는 출발부터 금수저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금수저 그룹에 넣을 줄 아는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 17~18세기 당쟁의 모략과 음모가 절정에 달했던 시대에 그는 자기를 지켜줄 든든한 줄을 잡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직속상관이나 권세가의 희망에 따라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선물도 했다.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남발했다는 혐의도 있다. 그렇다고 처세를 잘하고 세속적 욕망을 추구했다는 게 그의 흠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속에 발을 푹 담그고 있으면서도 세속을 뛰어넘고, 인간으로서 품격과 예술의 혼을 잃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빛날 뿐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인생 끝장날 것 같은 '곤장 사건'의 충격을 그는 더 큰 성취로 이어갔다. 학자들은 만년에 겸재가 도달한 경지를 "붓을 들어 마음대로 필묵을 구사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자유자재"라고 했다. 이런 경지에서 그가 일흔여섯에 남긴 게 '인왕제색'이다.

겸재와 동시대를 살았던 어떤 이는 겸재를 '근졸(謹拙)'하다고 했다. 신중하고 재주 부리지 않으며 순박했다는 뜻이다. 어떤 이는 "그가 쓰고 버린 붓이 산을 이루었다"고도 했다. 이런 품성과 노력 말고도 겸재의 삶을 지탱한 정신의 폭과 깊이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겸재의 삶이 부러워도 겸재만 한 그릇도 안 되는 형편에 이것저것 다 가지려 하다간 망신당하기 십상이라는 생각을 안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