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30년대 집장사가 지어 분양한 것으로 알려진 서울 북촌의 도시형 한옥은 대표적 민족자본가였던 정세권이 우리 민족의 주거권과 한옥 형태를 지키기 위해 벌인 도시 개발의 산물이었다."

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어사정위원들이 현충사를 방문하고 찍은 기념사진. 앞줄 맨 왼쪽이 정세권, 둘째 줄 왼쪽에서 둘째가 이극로, 넷째가 안재홍이다.

지난 23일 서울 YMCA회관 2층 대강당에서 일제 치하 조선일보 주필·사장을 역임하며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민세 안재홍(1891~1965) 선생과 동지적 관계를 맺었던 인물들의 민족운동을 짚어보는 '제10회 민세학술대회'가 열렸다. 안재홍·이상재·이승복·이극로·정세권·김원봉 등 민족운동가들이 이념과 직업을 뛰어넘어 펼쳤던 활동을 검토한 이날 학술회의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당시 대표적 부동산 개발 회사였던 건양사를 이끌며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정세권(1888~1965)에 대한 재조명이었다.

발표를 맡은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김경민 교수와 이지은 연구원에 따르면, 1920년 회사령이 철폐된 뒤 건양사를 설립한 정세권은 서울 가회동 일대를 비롯한 북촌의 한옥 대저택을 사들여 여러 채로 분할해 도시형 한옥을 지어 분양했다. 당시 서울 명동과 퇴계로 등 남촌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경성 거주 인구가 급증하면서 북촌을 넘보고 있었다. 정세권은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을 막아야 한다"며 북촌 재개발에 나섰다. 정세권이 조성한 도시형 한옥은 북촌과 인근뿐 아니라 창신동·서대문·왕십리 등 교외까지 이르렀다. 정세권은 일제의 탄압으로 사업을 사실상 중단한 1940년까지 한 해 300채 정도의 한옥을 지었다.

1929년 2월 7일 자 조선일보 2면에 실린 건양사의 신축 한옥 주택 분양 광고.

정세권은 도시 개발로 얻은 부(富)를 민족운동에 사용했다.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를 맡아 재정의 상당 부분을 부담했고 기관지를 발간했다. 조선어학회에는 회관을 지어 기증하고 운영비를 지원했으며 이 때문에 조선어학회 사건 때 수감됐다. 그는 또 신간회 경성지회에서도 활동했다. 정세권은 국내 민족운동의 중심인물이던 안재홍, 조선어학회를 이끌던 국어학자 이극로(1893~1978)와 유대가 깊었고 이를 토대로 산(産)·학(學)·언(言)의 연대 활동을 도모했다. 건양사는 조선일보와 주택 개선 공모전을 함께 개최했고 광고를 집중 게재했다.

역시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월남 이상재 선생의 민족운동을 다룬 발표에서 김권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상재는 개화기 이래 참여한 민족운동 단체에서의 인적 관계를 통해 민족 지도자로 성장해 갔다"고 분석했다. 독립협회 활동 때는 서재필·윤치호·남궁억·박은식 등의 지원과 협력에 의해 지도자로 떠올랐고, YMCA에서는 이승만·양기탁·전덕기 등 개신교 지도자, 게일·헐버트 등 외국인 선교사와 깊은 인적 관계를 형성하며 조직적 기반을 마련했다. 3·1운동 당시는 천도교·개신교·교육계 지도자들을 묶어준 배후의 주역이었다. 그가 안재홍 등이 주도한 신간회 창립 때 회장으로 추대된 것은 이런 교류와 협력을 통해 가장 존경받고 신뢰받는 민족 지도자가 됐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