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스미는ㅣ조지 오웰·버지니아 울프 등 지음ㅣ강경이·박지홍 엮음ㅣ강경이 옮김ㅣ봄날의책ㅣ304쪽ㅣ1만5000원

제목과 같은 독서였음을 고백해야겠다. 첫눈에 반하는 격렬함이 아니라, 느릿느릿 스며들다가 결국 배어들고마는. 표지의 여섯 글자가 예감했다는 듯 느긋하다. '천천히, 스미는.'

조지 오웰, 버지니아 울프, 헨리 데이비드 소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등 20세기 안팎, 25명의 영미 작가가 펼치는 32편 산문의 축제다.

인공지능 사회에서 영구 제명되지 않으려면 당장 준비해야 한다는 주변의 호들갑,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예각으로 혐오하는 발언들, 당신은 어느 진영에 속하느냐 눈 부릅뜨고 묻는 2016년의 한국 사회에서, 웬 시대착오적 여유냐고 물을 수 있겠다. 시월을 일주일 앞둔 지금, 시월의 나무를 등장시킨 의문문으로 반박해보자.

"시월의 느릅나무처럼 돈 한 푼 들지 않을뿐더러, 좌파 신문 편집장들이 계급 관점이라 부를 만한 게 없는 자연 현상 덕택에 삶이 종종 살 만하다고 말한다면, 정치적으로 비난받을 일인가."

이 책에 10번째로 실린, '동물농장'의 작가이자 신실한 사회주의자였던 조지 오웰의 글 한 대목이다. 제목은 '두꺼비에 대한 몇 가지 생각'. 혐오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듯한 이 흉물로부터, 오웰은 지구상의 다른 어느 생명체보다 아름다운 눈을 발견한다. "인장 반지에 가끔 박히는, 아마 금록석이라 불리는 금색 준보석 같은 눈"이라는 비유다. 그리고 스무 마리가 암수 구별 없이 서로 매달린 채 덩어리로 물속에서 뒹구는 이 양서류의 성적 에너지를 예찬하는 것이다.

정치 지상주의자들은 "사람들은 불만족스러워야 하며, 우리의 임무는 우리의 결핍을 배가시키고,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늘리지 않는 것"이라 믿을지 모른다. 삶의 즐거움은 정치적 침묵을 조장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지금의 가을을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무슨무슨 주의자들이 약속하는 유토피아에선들 행복할 수 있을까.

(왼쪽)윌리엄 포크너, (오른쪽 위부터)조지 오웰,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버지니아 울프.

'위대한 개츠비'를 쓴 스콧 피츠제럴드의 에세이 '잠과 깸'의 위트를 보자. 짐작하겠지만, 불면증과의 사투(死鬪)다. 소중한 일곱 시간 수면이 자의와 상관없이 둘로 쪼개지고, 달콤했던 첫 전반부 수면에서 깨어난 후 시작된 정적. 불현듯 나타난 외로운 모기 한 마리와의 대결이 시작된다. 허공을 때리다가 간발의 차이로 자기 귀를 후려치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쓰는 전통적 수비로 맞섰더니, 이불을 꼭 붙드느라 노출된 손을 저격하는 치밀함….

25명의 작가들은 현대인이 너무 바빠 대충 넘어가는 작고 사소한 순간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반드시 즐거운 깨달음인 것은 아니다. 작가의 렌즈로 들여다본 자연과 인간과 사물들. "배고프냐"고 친절하게 묻는 북부 출신 백인의 질문에 사실을 사실대로 밝힐 수 없었던 흑인 작가 리처드 라이트의 소년 시절(어떤 질문), 친구보다 친구의 아내에게서 더 빛나는 재능을 발견했지만, 그 여인의 때이른 부고를 들어야만 했던 영국 작가 맥스 비어봄의 추억(윌리엄과 메리), 저녁 햇빛을 등지고 달려온 차에 목숨을 잃었던 사냥개 피트를 추모하는 윌리엄 포크너의 쓸쓸함(그의 이름은 피트였습니다), 예술가적 기질은 딸국질이나 히스테리 발작처럼 치료되어야 할 기질이라고 믿는 이모 할머니들의 편견을 뚫고 소설가가 된 미국 작가 제임스 서버의 유머(제임스 서버의 은밀한 인생), 읽을 책보다는 읽지 말아야 할 책의 리스트를 제시하는 게 시급하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일갈(읽을 것이냐 읽지 않을 것이냐), 아내의 요양을 위해 피렌체로 떠나 이탈리아어를 배우게 되는 마크 트웨인의 엉뚱함(나의 이탈리어 독학기)….

추리소설 '브라운 신부'를 쓴 G K 체스터튼은 "아이처럼 논다는 말은 세상에서 노는 일이 제일 중요한 것처럼 논다는 뜻"이라고 했다. 유용(有用)과 실용(實用)이 아니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 초고속 현대사회는 언제까지 이 강박적 스트레스를 버텨낼 수 있을까.

역시 이 산문집의 필자 중 한 명인 버지니아 울프는 "에세이를 읽을 때 우리는 모든 능력이 활발하게 깨어 즐거움의 햇볕을 쬐는 느낌이 든다. 또 좋은 에세이는 첫 문장부터 우리를 사로잡아 삶을 더 강렬해진 형태의 무아지경으로 빠뜨린다"고 썼다. 이 책에 실린 32편의 에세이가 한결같이 우리를 무아지경으로 빠뜨리는 건 아니지만, 이 속도와 효율 지상주의 사회에서 잠시라도 '아이처럼 노는 즐거움'의 순간을 누려 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