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승리ㅣ소어 핸슨 지음ㅣ하윤숙 옮김ㅣ에이도스ㅣ384쪽ㅣ2만원

재기와 냉소 함께 넘쳤던 버나드 쇼(1856~1950)의 문장으로 시작해보자.

"하나의 도토리 안에 집약되어 있는 강렬한 에너지를 생각해보라. 땅에 도토리를 심으면 엄청나게 팽창하여 거대한 참나무로 자란다! 양 한 마리를 땅에 묻어보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썩을 뿐이다."('쇼의 눈으로 본 채식주의자의 식사'·1918)

'울창한 숲' '깃털'을 쓴 생물학자 소어 핸슨이 돌아왔다. 유머 넘치는 자연과학 글쓰기의 대표 선수가 귀환했다는 뜻이다. 전작에서 마운틴고릴라와 생명체의 깃털을 주제로 '존 버로스 메달' 등 자연과학 분야 저술상을 잇따라 받았던 매혹적 이야기꾼은, '씨앗'을 이번 주제로 선택했다.

씨앗의 에너지를 소개하는 핸슨의 서술 방식을 보자. 그는 동네 식료품점에서 '실링 애니멀 리필스' 풍선세트를 샀던 소년 시절 이야기를 꺼낸다. 핑크와 오렌지색 풍선 스물네 개. 바람 빠진 홀쭉한 풍선 24개는 손바닥에 올려 놓으면 한주먹에 들어오는 아담한 분량이다. 길이는 7.5㎝. 소년 핸슨은 이제 입으로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는다. 마지막 24번째를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45분. 머리는 어질어질, 숨은 거칠다. '빵빵'해진 풍선 하나는 길이 1.25m, 가로 60㎝, 높이30㎝. 24개를 한 줄로 이으면 방 책상을 넘어, 정원의 텃밭과 대문을 지난 뒤, 도로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 29m 길이다.

씨앗이 바로 그렇다. 바람이 아니라 물을 주면, 뿌리 세포가 사실상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활동하면서 길게 뻗어나간다는 것. 손톱만 한 씨앗에서 싹을 틔웠던 열대우림 알멘드로 나무의 성숙한 개체는 45m 이상 자라고, 나무 밑동은 가로 3m나 된다. 씨앗이 지닌 에너지는 그렇게 폭발적이다.

하찮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우아하고 경이로운 진화의 타임캡슐. 털 없는 닭과 거미줄 낳는 염소가 등장하는 유전학의 시대에 웬 고리타분한 씨앗 이야기냐고 물을 수 있겠다. 핸슨은 "씨앗에 관해 이야기하노라면 우리가 식물·동물·토양·계절 등 진화 과정 자체와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서 "전체 인류 중 도시 생활자가 처음으로 절반을 넘어선 이 시대에, 그 연결성을 재확인하는 작업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다섯 장인 각 장의 제목은 씨앗의 역할 자체이기도 하다. '씨앗은 영양분을 공급한다' '씨앗은 맺어준다' '씨앗은 견딘다' '씨앗은 방어한다' '씨앗은 이동한다'.

풍선과 씨앗의 사례도 그렇지만, 핸슨은 늘 자신이 경험한 일화와 씨앗의 자연사·문화사를 결합시킨다. '씨앗은 영양분을 공급한다'의 장(章)에서 핸슨이 예로 드는 일화는 '아몬드 조이 초코바'. 소년 시절 일주일 용돈과 맞먹는 25센트를 줘야 먹을 수 있는 사치품이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고 썼다. 구운 아몬드를 깨 먹는 맛과 아몬드를 감싸고 있는 코코넛의 달콤한 맛까지, 이는 '온전히 씨앗을 기반으로 하는 경험'이었다는 것. 그러고 나서 세계에서 가장 큰 씨앗의 하나로 꼽히는 카카오 씨앗의 기원과 진화 과정, 그리고 역사·문화적 사례들을 분방하게 펼쳐나간다. 입안에서 초콜릿이 살살 녹는 이유는 카카오 콩을 고온 고압에서 짜낸 코코아버터가 32도에서 액체가 되기 때문이며, '생명의 나무'로 불리는 코코아 나무는 비누, 버튼, 숯, 화분용 흙, 로프, 천, 낚싯줄, 바닥 매트, 모기 살충제 등의 재료로 쓰일 만큼 다양한 용도를 자랑한다는 것. 할리우드조차 카카오를 사랑했다. 시트콤 '브레이드 번치'에서 절반으로 잘라내고 비운 코코넛은 물을 마시는 컵의 대용으로 쓰였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히트작 '블루 하와이'에서는 브라 컵으로 전용됐다며 익살 부린다.

약 3억년 전 고생대 석탄기를 묘사한 그림. 양치류, 속새류 등 포자식물이 뒤덮은 늪지 세계다. 최근의 연구는 이 시대에도 침엽수를 비롯한 종자식물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고 설명한다.

자신이 찾아낼 수 없으면, 그 분야 전공 교수들에게 바로 묻는 게 핸슨의 방식이다. 부부 합쳐 씨앗에 관해 450편 이상의 논문을 쓴 켄터키 대학 캐럴 배스킨 교수도 그렇게 핸슨의 질문을 받았다. 배스킨 교수는 "씨앗은 어린 식물체가 (영양분을 공급하는) 도시락과 함께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상자 안에 도시락과 함께 들어있는 아기'가 곧 씨앗이라는 것. 하지만 도시락도 여러 종류가 있고, 아기 중에도 도시락을 다 먹는 녀석과 아예 한입도 먹지 않는 녀석이 있지 않은가.

배스킨과 핸슨이 동의한 가설은 진화다. 진화의 최종 목표는 그 종(種)으로서 살아남아 성공하는 것. 어린 싹에게 영양분을 제공하는 방식에도 기후와 토양과 생명체에 따라 저만의 해결책이 있는 것이다. 한 발짝 더 나아가면, 먹이사슬 바닥 단계로 씨앗을 내려다보는 시선 역시 인간 중심의 착각일 뿐이다. 씨앗 입장에서는 달콤한 과일과 풍부한 맛으로 유혹해 먹게 한 뒤, 결국 자신들의 확산을 돕게 만드는 수단인 것이다.

핸슨은 씨앗을 좋아하는 아들 노아 이야기로 마침표를 찍는다. 영양분, 인내, 보호 등은 씨앗이 보여주는 놀라운 특징이지만, 이 모든 것은 다음 세대에게 이로움을 줄 때에만 지속될 수 있다는 것. 씨앗은 그래서 곧 미래가 된다.

위트 넘치지만 가볍지 않고,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다. 교양과 재미를 동시에 주는 과학 독서의 체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