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서울 금호아트홀에서 열린 고(故)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10주기 추모 음악회. 이날 무대에는 소문난 클래식 애호가였던 고인이 살뜰히 챙겼던 금호영재콘서트의 첫 연주자 손열음(피아노), 권혁주(바이올린), 고봉인(첼로)이 올랐다. 손열음과 권혁주는 잘 알려져 있지만 고봉인은 낯설어하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무대에 홀로 나와 스페인 작곡가 카사도의 '독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을 켜는 순간 객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 사람 누구야? 소리 참 좋은데!" 날렵한 활 놀림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고봉인(31)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유방암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전문 연구원. 국내에서 보기 드문, 과학과 음악 두 갈래 길을 동시에 걷는 첼리스트다.

독주회를 앞두고 첼로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지난 7일 서울 서초동의 악기점을 찾은 고봉인. 이날 오전에도 대전 카이스트서 실험하다 점심 시간을 틈타 서울로 온 그가 연구실 가운을 손에 들고 있다.

고봉인이 오는 22일과 다음 달 27일 두 차례에 걸쳐 독주회를 연다. 추모 음악회에 이어 그동안 대관령국제음악제 저명 연주가 시리즈, 정명훈이 지휘하는 도쿄 필과 한·중·일 순회공연 등 연주회에 다수 섰지만 독주회는 7년 만이다. 특히 첫날 프로그램은 윤이상의 '첼로 독주를 위한 활주'를 비롯해 브리튼의 '첼로 독주를 위한 모음곡 3번', 코다이의 '첼로 독주를 위한 소나타' 등 무반주 첼로 곡들로만 채운다.

여덟 살 때 카잘스가 연주하는 베토벤 첼로 소나타 음반을 듣고 "이 길이 내 길"이라 확신했지만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음악을 시키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암 성장과 전이에 간여하는 핵심 인자를 발견하고 이를 차단하는 제제를 개발해 암 치료제 개발에 전기를 마련한 고규영 기초과학연구원(IBS) 혈관연구단장.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단 한 번 짜증 내지 않으니까 '과학자로 살면 맨날 웃고 다니는구나, 내 자식도 그랬으면 좋겠다' 바라셨던 거예요. 정작 아버지는 저한테 음악가로 살라 하셨어요(웃음)."

아홉 살이 되어서야 첼로를 시작했지만 1년 만에 첼리스트 정명화의 눈에 띄어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에 들어갔다. 2년 뒤인 1997년 차이콥스키 국제 청소년 콩쿠르에서 첼로 부문 1위를 차지했고,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한했을 때 청와대에서 연주도 했다. 독일로 유학 가 거장 다비드 게링가스에게 배운 그는 2000년 크론베르크 첼로 마스터클래스에서 입상하며 유럽 음악계 샛별로 떠올랐다. 주위에서 학업을 관두고 첼로에만 집중하라고 강권할 만큼 이름도 널리 알려졌다. 그 순간 물음이 싹텄다. '왜 하나만 해야 하지? 난 아직 어리고,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은데!'

음악가로 살면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런데 실험을 못 하면 불행할 것 같았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유럽 역사를 보면 르네상스 때 클래식이 최고조로 발전했어요. 그 시대 사람들이 존경한 인물은 과학, 철학, 음악, 미술을 두루 잘해낸 사람이었고요." 과학과 음악을 둘 다 하고 싶어 하는 고봉인에게 복수 학위 프로그램이 있는 하버드대는 딱 맞는 학교였다. 5년간 생물학에 몰두하는 동시에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수업 받으면서 생물학 학사와 첼로 석사를 모두 땄다. 2010년 프린스턴대에 진학해선 분자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명화도, 정명훈도 그런 그를 볼 때마다 농반진반 묻는다. "언제부터 첼로만 할 거야?"

카이스트 연구실에서 실험에 몰두해 있는 고봉인. 동료 연구원 서상헌씨가 찍었다.

그때마다 머릿속에 외할아버지를 떠올렸다. 내과 의사였던 외할아버지는 어릴 때 고봉인이 첼로를 연습하고 있으면 눈 감고 듣다가 입가에 미소를 띠곤 이렇게 말했다. '네가 연주하면서 그렇게 즐거워하면 듣는 사람은 얼마나 즐겁겠니.' 외할아버지는 고봉인이 대학교 1학년일 때 암으로 돌아가셨다. "삶을 바라보는 틀이 생기기 시작하는 시기잖아요. 외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연구와 음악 둘 다 치열하게 해내자 다짐했어요."

생물학은 온종일 실험체를 들여다보며 상태를 관찰해야 한다. 그가 자리를 비워도 실험실의 동물들은 계속해서 세포분열을 한다. "연주하러 가야 하니 2주만 좀 쉬어줘"라고 부탁할 수도 없다. 그는 실험실 옆 빈방에 첼로를 가져다 놓고 짬날 때마다 달려가 연습했다. 실험실 동료들도 "덕분에 공짜로 좋은 연주를 즐길 수 있어서 좋아한다"고 했다. 대개 저녁 먹고 밤 8시부터 두 시간은 첼로에만 집중한다.

"저는 엉덩이가 무거워서 가만히 앉아 우직하게 몸속을 들여다봐야 하는 생물학이 잘 맞아요. 수학이나 물리학처럼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어서 끈기도 좋아야 해요. 꾸준히 조금씩 발전하는 마라톤 같달까요. 생물학이 첼로와 비슷한 점이죠. 암 치료제를 개발해서 사람의 육체를 살리고, 가슴을 후벼 파는 첼로 연주로 다친 영혼을 다독여주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저한텐 그게 성공이에요." 고봉인이 느릿하게 말했다. ▷고봉인, 더 첼리스트=22일 오후 8시·10월 27일 오후 8시 금호아트홀, (02)6303-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