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근 논설위원

사람 잡는 맹독성 가습기 살균제를 10년이나 팔아놓고 지금까지 본사 책임은 없었다고 우기는 영국 기업 옥시. 허위 서류로 차량 판매 허가를 받아놓고 연비 문제가 불거지자 손해배상 얘기도 없이 리콜조차 미적대는 독일 기업 폴크스바겐. 매년 한국에서 1조원 넘는 매출을 올리면서 세금 한 푼 안 내고, 지도 정보를 공짜로 내놓으라 을러대는 미국 기업 구글까지. 요즘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들 행태가 우리 국민 속을 뒤집어 놓자고 미리 약속이나 한 것 같다.

과거에도 해외 명품업체나 자동차업체가 국내에서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받고 배짱 장사를 해 문제가 된 적은 있었다. 그런 얘기가 나올 때면 우리는 폼나는 브랜드에 열광하는 천박한 소비 문화나 허술한 법 규정을 탓했다. 우리 내수(內需) 시장이 하찮을 정도로 작아 어쩔 수 없다는 푸념도 따라붙었다. 최근 사건들도 이런 이유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경제 규모 세계 10위, 무역 규모 세계 6위다. 국내 소비자들의 깐깐한 취향을 시험대 삼아 세계시장에서의 성공을 가늠해 보려는 글로벌 기업도 부지기수다. 우리 위상이 어제와 천지차이인데 외국 기업 행태는 나아지긴커녕 더 심해졌다. 납득하기 어렵다.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건 작년 가을 구글 모회사인 알파벳의 에릭 슈밋 회장과 만나고 나서부터다. 슈밋 회장은 1시간 넘게 이어진 국내 언론과의 대화에서 절반 가까이를 국내 정치와 경제, 사회 현안에 대한 토의에 썼다. 자신과 구글에 대한 질문에는 알려진 답만 반복하거나 응답을 피했다. 세금과 사회 공헌 같은 기업의 역할을 추궁하자 정색했다. "구글은 한국법을 지키고, 의무를 다한다."

기업인이 시장 현지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고, 경영전략을 숨기려는 건 당연하다. "법은 지킨다"는데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우리가 자유화와 무역 개방의 원칙을 지키려고 외국 기업과 통상 마찰을 가급적 피한 건 부인하기 어렵다. 1990년대 이후 시장 개방으로 우리 기업들이 외국 기업과 경쟁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것도 사실이다. '범법이 아니면 문제가 없다'는 구글의 태도는 제한 없는 자유무역 시대엔 불문율과 같았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달라졌다. 유럽연합이 구글의 반독점 행위를 조사하고, 공짜로 유럽 언론들 뉴스를 가져다 썼다며 사용료를 물어내라고 요구한다. 미국은 국가 안보를 핑계로 중국이 자국 반도체나 바이오회사를 사들이는 걸 방해한다. 중국과 인도조차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울타리를 높인다. 먹고살기 힘드니 너도나도 예전엔 엄두조차 못 냈던 무역 장벽과 방패막이를 들고나온다.

그동안 정부와 재계는 이런 흐름으로 수출 기업들이 골탕을 먹으면 어떻게 대처할지를 주로 고민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 기업에 대해선 '개방과 자유'를 보장한다며 여전히 불공정 거래나 부당행위 논란이 벌어져도 손대는 데 신중을 기한다. 심지어 국가 안보가 달린 지도 반출 문제를 놓고도 글로벌 혁신과 기업 활동의 자유를 거론하는 목소리가 더 크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에게 '개방과 자유'는 최고의 가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 그 한계도 명확히 해야 한다. 이미 글로벌 통상 질서가 변했는데 우리만 과거에 머무른다면 외국 기업들이 앞으로도 우리를 쉽게 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