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1일 오전 7시 30분쯤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천동의 범내골 교차로에서 우회전하던 SUV 차량이 직진하던 다른 SUV 차량과 부딪치는 사고가 났다. 외관상 긁힌 자국(스크래치)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사고였지만, 2명의 운전자는 차를 세우고 서로 상대 잘못이라며 말다툼을 벌였다. 이들은 "현장을 보존해야 보험회사 직원이 누구 잘못인지 정확히 판단할 것"이라며 20여 분간 사고 차량을 그대로 뒀다. 두 차량 때문에 출근시간대 교통 정체에 걸린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며 "차를 갓길로 빼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들은 막무가내였다.

경미한 사고가 난 차량을 장시간 도로 위에 방치해 교통 흐름을 끊고 다른 운전자들의 불편을 초래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사고 차량 운전자들은 "쌍방의 과실 여부를 정확히 가리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고 해명한다. 그러나 이는 교통사고 처리에 대한 잘못된 교통 상식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손해보험협회는 지난 2011년 '교통사고 신속처리 표준 협의서'를 통해 인명 피해 없는 대물(對物) 사고의 경우 현장에서 필요한 사진을 찍은 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길가로 차량을 옮기라고 권고했다. 경찰이나 보험회사 직원은 사고 당시 사진과 차량에 남은 흔적만으로도 사고 정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각하지 않은 사고 차량을 방치하는 것은 불필요한 교통 방해일 뿐이라고 협회는 밝혔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이런 권고를 따르는 운전자는 찾기 어렵다.

그래픽=김성규 기자

상당수 운전자는 사고가 났을 때 신속하게 현장 수습을 시도하지 않고 가족이나 친구 등 전문 지식이 없는 주변인에게 연락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본지가 지난 11~18일 운전자 131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사고가 났을 때 약 33.6%가 경찰이나 보험회사 직원이 아니라 가족ㆍ연인ㆍ친구에게 전화한다고 응답했다. 또 응답자 중 44.2%는 사고를 당했을 때 차량을 갓길로 옮기기에 앞서 스마트폰으로 사고 대처 요령을 검색해 본다고 답했다. 심재익 한국교통연구원 연구위원은 "사고가 나면 당황스럽더라도 가까운 지인(知人)보다는 경찰과 보험사 등 사고 처리 전문가에게 곧장 전화하는 것이 사고 처리를 앞당기고 통행에도 불편을 주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사고 차량 방치는 더 큰 2차 사고로 이어지곤 한다. 지난 9일 오전 4시 30분쯤 경기 평택시 평택-제천고속도로 청북 나들목에서 제천 방향으로 1㎞ 떨어진 곳에서 11.5t 화물차가 정지해있던 덤프트럭 후미를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화물차 운전자(54)가 숨지고 덤프트럭 운전자(31)가 다쳤다. 경찰 조사 결과, 덤프트럭 운전자는 차선 변경을 시도하던 승용차와 접촉 사고를 낸 뒤 사고 처리를 위해 차를 도로 위에 그대로 세워둔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청에 따르면 사고를 당해 멈춰 있는 차량을 들이받아 발생하는 2차 사고는 지난 2011년 446건에서 지난해 585건으로 4년 만에 31% 늘었다. 부상자는 같은 기간 1016명에서 1277명으로 증가했고, 사망자도 17명에서 36명으로 배 이상으로 늘었다. 올 상반기에는 고속도로에서만 2차 사고가 44건 발생해 20명이 숨졌다. 사고 대비 사망률은 45%로, 같은 기간 전체 교통사고 사망률(11.2%)의 4배를 넘었다.

경찰 관계자는 "차량이 빨리 달리는 고속도로에서는 길 가운데에 서 있는 차를 보고 피하기 어렵다"며 "사고 차량을 재빨리 갓길로 옮기지 않으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매우 크다"고 했다. 지난 2010년 7월 인천대교를 달리던 버스가 10m 다리 아래로 추락해 12명이 숨진 참사도 2차로에 고장으로 정차해 있던 마티즈 차량을 피하려다 벌어진 사고였다. 당시 마티즈는 변속기가 고장 났지만 저속 주행은 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충분히 길가로 차를 옮길 수 있었다고 경찰은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