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여당(與黨) 내에서 자신의 존재를 “비(非)주류 중 비주류”라고 해왔다. 그러면서 “보수 정당에서 나 같은 호남(湖南) 출신, 비(非)명문대 출신, 사무처 말단 당직자 출신…. 이렇게 비주류 중에 비주류인 내가 새누리당 대표가 되는 것 자체가 정치혁명”이라고 했었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지난 2014년 7월 30일 재보선 때 전남 순천곡성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당선됐다. 당시 이 대표는 자전거를 타고 지역구를 다니며 '나홀로 선거운동'을 펼쳤다. 사진은 이 대표가 당선된 뒤 자전거를 타고 지역구를 돌며 유권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 모습.

◇‘거위의 꿈’ ‘을(乙)의 인생’

이 대표의 핸드폰 컬러링은 가수 인순이의 노래 ‘거위의 꿈’이다.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히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로 흘릴 때도 난 참아야했죠. 그날을 위해’라는 가사를 담고 있다.

이 대표는 이 노래에 대해 “내 인생 그 자체”라고 했었다. 그는 1958년 전남 곡성에서 ‘쌍암 담터댁’ 큰아들로 태어났다. 곡성 목사초등학교, 순천 주암중, 광주 살레시오고, 동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차례로 졸업했다.

이 대표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1985년. 구용상 전 전남지사가 민정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하자 대학생이던 이 대표가 “정치를 똑바로 하라”고 편지를 보냈다. 구 전 지사가 이에 “그럼 나와 함께 일해보자”고 하면서 그의 비서가 됐고, 이후 민정당 사무처 당직자로 특채됐다.

이 대표는 “당 사무처 가장 말단인 ‘간사 병(丙)’으로 시작해 16단계를 하나씩 밟고 올라와 당 대표가 됐다”고 말한다. ‘간사 병’ 시절 이 대표는 기자실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복사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야, 정현아. 이거 복사 좀 해주라”라는 젊은 기자들의 심부름에도 “예”라고 답했다.

이 대표는 당 대표에 당선한 뒤 정세균 국회의장,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원장을 찾아가 허리를90도로 굽히며 인사했다.

이를 본 한 당직자는 “‘을(乙)의 인생’을 살아온 이 대표가 몸에 밴 습관”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가 맡았던 역할은 수석부대변인, 대선캠프 공보특보, 정무팀장, 정무수석, 홍보수석 등이다. 언론과 야당을 상대로 부탁하고 사정해야 하는 ‘을’의 입장인 자리라 할 수 있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당 대표에 당선된 뒤 정세균 국회의장을 찾아가 허리를 거의 90도로 굽히며 인사를 하고 있다. 당 관계자는 "이 대표가 당 사무처 말단 당직자부터 시작해 '을의 자세'가 몸에 배어 있다"고 말했다.

◇‘박근혜의 입’

이 대표는 2004년 17대 총선 때 광주 서구을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것을 계기로 박근혜 대통령과 정치적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박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어려운 곳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냐”고 하자 이 대표는 “한나라당이 호남을 홀대해서는 발전할 수 없다. 호남 포기 전략을 포기해달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어쩌면 그리 말을 잘 하냐”고 한 뒤 그를 당 수석부대변인에 임명했다.

이후 이 대표는 ‘박근혜의 입’ 역할을 해왔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공보특보를 맡으면서 ‘원조친박’으로 나섰다. 이 대표는 박 대통령의 지난 10년 간 어록(語錄)을 모두 외우고 있기도 하다. 발언 내용뿐 아니라 맥락과 의도까지 줄줄이 꿰고 있다.

이 대표는 지난 대선 때 박 대통령의 대선캠프 공보단장, 인수위 때 당선인 비서실 정무팀장을 거쳐 이번 정부 들어 청와대 정무수석, 홍보수석을 잇따라 지냈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는 당 대표 경선 기간에 캠프를 따로 차리지 않고 혼자 배낭을 메고 전국을 돌며 국민을 만났다. 사진은 이 대표가 당선된 후 자기가 메고 다녔던 배낭을 기자들에게 보여주는 모습.

◇‘세 차례 도전 끝에 호남에서 금배지’

이 대표는 3선(選) 의원이다. 18대 총선 때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첫 금배지를 달았다. 19대 총선 때는 광주 서구을에 새누리당 후보로 나섰지만 17대 총선에 이어 두번째 낙선의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2014년 7·30 재보선 때 전남 순천·곡성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해 49.4% 득표율로 당선했다. 새누리당 유일의 호남 지역구 의원이 탄생한 것이다. 언론은 “지역주의 철벽을 허물어뜨린 선거혁명”이라고 했었다.

7·30 재보선 당시 이 대표는 자전거를 타고 지역구를 돌며 ‘나홀로 선거운동’을 벌였다. “당선되면 호남에 ‘예산 폭탄’을 떨어뜨리겠다”는 공약도 내걸었다. 당시 이 대표를 동행 취재했던 한 방송사 기자는 “처음에는 ‘호남에서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될 수 있겠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대표가 새벽 3시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유권자들을 만나는 모습, 유권자들의 긍정적 반응 등을 보면서 ‘이정현이 되겠구나’하는 느낌이 오더라”고 전했다.

이 대표는 이번 4·13 총선 때도 전남 순천에서 당선했다. 정운천 의원이 전북 전주시을에서 당선하며 새누리당 호남 지역구 의원은 2명으로 늘어났다.

◇“아내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이 대표는 부인 김민경씨와 사이에 아들 둘을 뒀다. 이 대표는 부인을 ‘집친구’라고 부른다. 부인은 유방암으로 세 차례 수술을 받고 투병을 하며 남편의 전남 순천 선거운동에 나섰다.

이 대표는 언론 인터뷰에서 “아내가 젊을 때 민화(民畫)로 국전(國展)에 입선도 하고 했는데 나 때문에 고생했다. 나는 우리 애들 나온 학교 이름도 모를 정도로 가정을 돌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집친구라고 말하는 순간 목부터 멘다. 강연에서도 그 단어를 내가 잘 들먹이지 못한다”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