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영화 '곡성'으로 칸 국제영화제를 찾은 천우희는 영화 시사 이후 가진 사진 촬영 때 분홍색 바지 정장을 입고 나왔다. 재킷 안에 블라우스나 셔츠, 티셔츠를 입지 않았다. 어깨와 팔, 다리를 다 드러내는 드레스를 입을 때보다 노출은 적었지만 목에서 가슴까지 이어지는 선에 눈길이 갔다. 이날 천우희는 당당하고 섹시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가 입은 국내 브랜드 '아보아보'의 바지 정장은 일시 품절이 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①영화 제작 발표회에서 트위드 소재 바지 정장을 입은 배우 전도연. ②칸 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서 검정 바지 정장을 입은 배우 샬리즈 시어런.

여자들이 힘을 입는다.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힘을 발휘하는 옷은 정장, 그중에서도 바지 정장이다. 일부 전문직 여성이 입는 딱딱한 옷으로 인식됐던 바지 정장이 패션쇼 무대와 레드 카펫에 오르기 시작했다. 여배우들의 드레스 자락이 레드 카펫을 쓸고 다니는 칸 국제영화제에서도 올해는 바지 정장을 입고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여배우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천우희뿐만 아니라 수전 서랜던, 샬리즈 시어런, 이자벨 위페르 등이 모두 검정 바지 정장을 입었다. 배우 에마 왓슨, 귀네스 팰트로, 케이트 블란쳇과 모델 지지 하디드, 칼리 클로스 등은 모두 최근 6개월간 공식 석상에 바지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바지 정장의 유행은 이미 지난해 해외 컬렉션에서 시작됐다. 특히 '젠더리스(성중립)'가 패션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여성복에서 바지 정장은 필수 품목이 됐다. 구찌는 자수를 놓은 바지 정장, 꽃무늬 바지 정장을 시즌마다 선보였고, 아크네가 올 봄·여름 컬렉션으로 내놓은 바지 정장은 매장에 나오자마자 품절이 됐다. 올 가을·겨울 컬렉션에서도 대부분의 브랜드가 바지 정장을 내놨다. 모직, 벨벳, 코듀로이와 원색, 체크, 핀스트라이프 등 원단과 소재도 다양하다. 이들이 가진 공통점은 단 한 가지. 예전처럼 정장 재킷에 청바지나 원피스를 함께 입는 '믹스 매치'가 아니라 동일한 소재의 재킷과 바지로 한 벌 쫙 빼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지 정장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이 옷이 경직되고 고루하다는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여성들이 풍선처럼 부푼 치마를 즐겨 입던 시절에 홀로 바지 정장을 입었던 캐서린 헵번을 떠올리면 된다. 바지통이 넓은 체크 정장을 즐겨 입은 그는 발랄하고도 섹시했다. 전도연처럼 트위드 정장을 입을 수도 있고, 지지 하디드처럼 새빨간 정장을 선택해도 된다. 하이힐과 로퍼, 그리고 스니커즈까지 다양한 신발과 어울리는 옷이기 때문에 정장 구두만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

바지 정장은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다. 여자들이 바지를 입는 게 법으로 금지된 시절에는 여권 신장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보란 듯이 바지 정장을 입었다. 여자들의 사회 활동이 활발해진 뒤부터는 남자와 다름없이 일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바지 정장을 입었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색깔만 다른 바지 정장을 돌려입는다"고 놀림을 받으면서도 이 옷을 고수하는 것은 바지 정장이 상징하는 권력 때문이다. 바지 정장은 힘과 멋을 동시에 드러내는 여성들의 '갑옷'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