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논설주간

새누리당 새 대표로 이정현 의원이 당선되는 모습을 보면서 불현듯 17~18년 전쯤의 어느 장면이 떠올랐다. 필자는 지금은 여당인 당시의 야당을 취재하고 있었다. 기자실에서 누군가 "야, 정현아~!"라고 큰 소리로 불렀다. 당 사무처 직원이지만 많은 출입기자보다 나이가 위인 걸로 알고 있는데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예!" 하는 어김없는 대답이 들린다. 이어지는 말. "이거 급한데 복사 좀 해주라."

그 이정현이 여당의 대표가 됐다. 이 대표가 자신의 대표 당선을 '기적'이라고 부른다는데 최소한 필자는 큰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계 주요국 정당사에 프레스룸에서 복사하던 직원이 대표에 오른 사례가 있는지 모르겠다. 혹시 있다면 그 나라에서도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 대표는 17계단을 올라왔다고 한다. 필자는 그가 밑에서 두세 번째 계단에 있을 때 보았던 것 같다. 그가 필자와 동갑이란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 몇 살은 아래일 걸로 생각했다. 그렇게 알고 있던 이들이 많다. 그가 기자실에서 자료를 찾고 심지어는 복사까지 했던 사람이어서만은 아니다. 항상 지나칠 정도의 열성으로 기자들 뒷바라지를 하는 모습이 그런 오해도 낳았다.

중진 정치인들은 자신이 초년병일 때의 모습을 보았던 기자들과 잘 만나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다. 누구든 밑바닥 경험을 하기 마련이나 중진급이 되면 부끄러울 수 있는 당시의 얘기들이 거론되는 것이 달갑지 않기도 할 것이다. 이 대표도 그럴지 모르지만 굳이 이 얘기를 하는 것은 그의 '밑바닥 경험'이 다른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당선 소감에서 "모두가 등 뒤에서 나를 비웃었다"고 했다. 비웃음을 당한 이유는 그 자신의 표현대로 "(정치권에서) 근본 없는 놈"이었기 때문이다. 지역이 모든 걸 가르는 한국 정치 풍토에서 그는 지역이 다른 당에 몸을 담았다. 말만 들어도 한 수 접고 들어갈 수 있는 학벌, 경력도 없다. 무슨 조그만 연줄 하나 없다. 그래서 정치권에서 그는 '흙수저'도 아니고 '무(無)수저'였다. 그것을 오로지 몸과 발로 때웠다.

그래서 이 대표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 이 대표는 당선 뒤 연설에서 "특권과 기득권과 권위주의와 형식주의는 결코 우리 주위에 머물지 못할 것"이라며 "국민 여러분께서는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당 혁신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많은 사람이 비슷한 약속을 했지만 아무도 지키지 않았다. 그런데 이 대표가 하는 말은 왠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그가 아무것도 없이 그야말로 바닥에서 올라온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 대표이기에 '(정치권에서) 근본 없었던 놈'의 혁명, '무수저 혁명'에 대한 기대가 생긴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 혁신은 달리 있지 않다. 추락할 대로 추락해 완전히 혐오 대상이 된 정치, 아무리 반목하고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게 정치라고 해도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정치를 바꾸는 것이다. 그 출발은 무슨 거창한 조치가 아니다. 지금 국회의원들은 '책임 50에 누리는 것 100'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책임 100에 누리는 것 50'으로 역전시키는 것이 바로 정치 개혁이다. 그리고 누리는 것을 100에서 50으로 낮추면 다른 많은 정치 변화가 차츰 저절로 따라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黨대표 이정현' 사전투표서 이미 판가름]

우리 국회를 방문했던 스웨덴 의원들이 인상적이었던 점을 꼽으며 "웬 리무진이 이렇게 많으냐"고 놀랐다고 한다. 그들은 스웨덴으로 돌아가 우리 국회에서 제공한 식사 값을 자기 출장비에서 뺐다고도 한다. 우리 국회가 이 방향으로 가면 국회의원이란 자리의 매력은 지금보다 크게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입신양명 출세하기 위해, 정파의 권력을 위해 의원이 되려는 사람들은 줄고 소명(召命)의식을 가진 사람, 봉사하려는 사람은 늘 것이다. 봉사하는 사람들은 지역 대결, 극한 대립, 반대를 위한 반대와 같은 정치와는 아무래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 북구(北歐)의 정치가 그렇다.

이 개혁은 아마도 국회의원 300명 거의 전부가 내심으로 반대할 것이다. 보수 진보, 노장 소장, 영남 호남 가리지 않고 반대할 것이다. 겉으로 반대하지 않고 뒤에서 사보타주하는 식으로 반대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매일 얼굴 보고 사는 정치인들, 형님 동생 하는 의원들의 이런 반대가 우리 국회의원을 봉사하는 자리가 아닌 누리는 자리로 만들고 굳혀왔다. 그러기에 '정치권에 근본 없는 사람' '무수저'는 혹시 이 카르텔을 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대표는 경선 연설 때 처절함까지 느껴지는 격정을 드러내 보였다. 사람들을 놀라게도 하고 걱정도 하게 만든 격정이다. 그 무서운 격정을 "33년간 지켜봤던 대한민국 정치의 모순을 반드시 바꾸겠다"는 약속에 쏟아부었으면 한다. 그래서 이 대표가 우리 국회를 누리는 자리가 아닌 봉사하는 자리로 바꾸는 첫 문을 열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