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천상륙작전'에 관객이 몰리면서 이 작전의 추진 과정과 성공 비결에 대한 궁금증도 커지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맥아더 사령관이 주도한 작전이라고만 할 뿐 사실은 그다지 알려진 게 없다. 6·25전쟁의 전사(戰史) 연구와 편찬 사업을 맡고 있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조성훈 전쟁사부장에게 자문해 인천상륙작전의 실체에 접근해본다.

◇애초 인천상륙작전 예정일은 7월 22일

1950년 6월 29일 한강 전선을 시찰한 맥아더 UN군 사령관은 미 제1기병사단을 인천에 상륙시키는 작전을 구상했다. 7월 22일로 작전 날짜까지 잡았다. 하지만 7월 20일 북한군에 대전을 빼앗기는 등 전황이 급박해지면서 작전은 연기됐다. 맥아더는 곧바로 상륙 작전을 재구상했다. '인천을 점령한 뒤 서울을 탈환하면 적의 보급로는 차단될 것'이라며 인천을 점찍었다. 하지만 극심한 조수(潮水) 간만(干滿)의 차이를 이유로 미 합참본부는 인천 대신 군산을 후보지로 내세웠다. 미 해군은 평택 포승읍을 제시했다. 결국 인천·군산·주문진 등 세 곳 상륙 계획안을 작성했고 최종 회의를 통해 인천으로 결정됐다.

인천상륙작전 당일인 1950년 9월 15일 미 해병대원들이 인천 응봉산 앞 해안에 상륙하기 위해 사다리로 제방을 올라가고 있다. 현재 응봉산 자유공원에는 맥아더 동상이 있다. 위 작은 사진은 마운트 매킨리호에 탑승하고 인천에 도착한 더글러스 맥아더 UN군 사령관.

[[키워드 정보] 6·25 전쟁이란?]

◇북한도 상륙 작전을 예견했다?

1956년 소련으로 망명한 이상조 전 북한군 정찰국장은 전쟁 당시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상륙 작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조언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이상조는 북한으로 돌아와 이 내용을 보고했지만 김일성은 귀담아듣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의 사전(事前) 인지설'은 최근까지도 학계에서 쟁점이 되고 있다. 1950년 8월 말쯤에 북한이 유엔군 상륙 작전에 대비하기 위해 경계 강화에 나섰다는 의견도 있다. 반면 북한군 주력은 낙동강 전선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천의 경계 강화는 일상적 수준이었다는 반론도 있다. 결과적으로 북한군은 상륙 작전의 정확한 일시와 장소는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미군만 상륙 작전에 참가했다?

맥아더는 미 10군단의 제1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을 인천에 상륙할 부대로 선택했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난 뒤 군비 축소 때문에 병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한국 청년 8600여 명을 선발해서 일본에서 3주간 훈련한 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했다. 이들은 카투사(KATUSA·주한 미군에 근무하는 한국군)의 실질적 기초가 됐다. 미군 두 사단, 한국군 제1해병연대와 육군 제17연대 등 지상군 7만5000여 명이 상륙 작전에 참가했으며, 미국(226척)·한국(15척)·영국(12척)·캐나다(3척), 호주와 뉴질랜드(각 2척), 프랑스(1척) 등의 함정 261척이 투입됐다.

◇경북 영덕에서도 상륙 시도

UN군은 정확한 작전 지역과 시간을 감추기 위해 기만 작전을 벌였다. 미주리호는 동해안의 삼척을 포격했고, 군산에서도 미국·영국의 특공대가 상륙을 가장한 군사작전을 벌였다.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인 14일 포항 북쪽 장사동(현재 경북 영덕)에서는 한국군 독립 제1유격대대 820여 명이 상륙을 시도했다. 하지만 심한 파도와 적군의 집중포화 때문에 배가 좌초했다. 120여 명이 전사하는 등 희생이 적지 않았지만, 북한군을 교란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공헌했다.

◇맥아더의 공(功)이 아니다?

2차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준비에 꼬박 1년이 걸렸지만, 인천상륙작전은 부대 동원을 포함한 작전 구상을 한 달 만에 마쳤다. 8월 2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미군 작전 회의에서도 반대 의견이 쏟아졌지만, 맥아더는 이렇게 설득했다. '실제로 저는 해군보다도 더 해군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인천에는 어려운 여건이 많지만, 해군의 능력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은 5000분의 1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역경에는 이미 익숙하다"고 회고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맥아더의 리더십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요인이라는 사실에 이견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