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기자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사람 중 쿠온 출판사 김승복(47) 대표가 있었다. 한국 문학에 별 관심 없던 일본에서 1인 출판사를 차리고 2010년부터 한국 문학 시리즈를 번역해 출간했던 인물. 14번까지 나온 이 시리즈의 제1번이 6년 전의 '채식주의자'였다.

마침 지난 1일 저녁 서울 상암동의 동네 책방 북바이북에서 열린 북토크 행사 초대 손님으로 방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행사 전 그를 만났다. '채식주의자' 수상 당일의 기억을 묻자, 겸연쩍은 얼굴로 작은 흥분을 되살린다. "일본의 몇몇 독자가 전화를 하셨더라고요. '축하한다, 김 대표. 당신 눈이 정확했구나.'"

기본적으로 김 대표는 업자(業者), 비즈니스우먼이다. 그런데 조금 독특하고 희귀한 업자다. 다음 달 20일 5호가 나오는 '일본어로 읽고 싶은 한국의 책-추천 50선'이 그 한 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지원을 일부 받아 김 대표가 펴내는 이 연간(年刊) 잡지의 대상 독자는 일본의 출판 관계자. 50권 각 권의 개략적 내용, 등장인물, 일본 독자가 느낄 매력 요소, 샘플 번역 등 구체적인 정보를 담았다. 김 대표와 뜻을 함께하는 한국 문화 전공자 등이 직접 읽고 엄선해서 원고를 쓴다. 그렇다면 쿠온이 번역해서 펴내는가? NO. 일본 유수 출판사로의 '연결'이 목적이다. 중개 수수료라도 받을까. 전혀. 그럼 왜?

쿠온 김승복 대표는 200명을 돌파했다는 일본인 자원봉사자 그룹을 자랑스러워했다.‘ 일본어로 읽고 싶은 한국의 책’원고를 일본어로 번역하거나, 서점‘책거리’의 이벤트를 지원하는 충성도 높은 한국 문학 독자들이다. 일본 쿠온에서 먼저 출간되고 한국에서 다시 번역되어 나온‘한국의 지를 읽다’가 김 대표 왼쪽으로 보인다. 장소는 합정동 빨간책방.

"이 좋은 걸 일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가 그의 대답이었다. "한국에 이렇게 재미있는 출판 콘텐츠가 많으니 한번 내보시라는 취지죠." 4호까지 200권을 추천했고, 이 중 40권이 계약됐으며, 실제로 출간된 작품에는 윤태호의 만화 '미생'등이 있다.

김 대표는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89학번. 시인 이원, 소설가 하성란·조경란 등이 함께 다닌 선후배이고, 재학 시절에는 교지 편집장을 지냈다. 해외여행 자유화 바람이 처음 불었던 1991년, "다른 세계를 만나고 싶어서"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이후 일본에서의 25년은 니혼대 문예과(평론) 졸업, 광고회사 입사, 쿠온 출판사 창업, 일본 진보초에 한국책 서점 '책거리' 개점 등으로 요약된다. 이 역동적이면서도 일관성 있는 삶을 지탱하는 세계관은 두 가지. '이 좋은 걸 알리고 싶어서'와 '한다면 지금이다'였다.

물론 무시와 오해도 있다. 한국의 한 유명 작가에게 쿠온에서의 출간을 제안했다가 "일본 출판사에서 내겠다"며 거절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문학 자체에 별 관심이 없고, 정보도 없으며, 자국 문학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일본 출판사에 무슨 다급함이 있으랴. 그 작가는 아직 일본에서 책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그 작가의 책도 '일본어로 읽고 싶은…'에 포함시켰다. "결국은 자기 장사 하려는 것 아니냐"라는 오해를 받기 싫었던 까닭이다.

신경림·구효서·김연수·김중혁·박민규 등 14권의 한국 문학을 펴내는 동안 중쇄 이상을 찍은 책이 '채식주의자' 한 권에 불과할 만큼 양적으로는 미미한 성장. 좋은 걸 먼저 '맛본' 사람으로서, 그 좋은 걸 많이 알아봐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섭섭함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김 대표는 고개를 흔들었다. "쿠온의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아사히신문에서 리뷰로 주목하고, 한국 문학 독서토론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늘어났어요. 질문 수준도 높아졌고요. 좋은 걸 맛본 사람은 이제 다른 쪽으로 가기 어려울 거예요."

지난해 그는 도쿄의 책방 거리로 이름난 진보초에 서점 '책거리'를 냈다. 대략 15평에 불과한 소박한 공간이지만, 진보초 유일의 한국책 전문 서점. 한국어 원서 3000여 종, 일본어로 쓴 한국 관련 서적을 500여 종 구비했다. 지금도 매달 350여 종씩 새로 한국에서 들여온다. "내가 본 책만 독자에게 추천한다"는 원칙으로 하루 2~3권을 읽는다.

문득 학부 시절 문예창작을 전공했던 김 대표가 창작을 꿈꾼 적은 없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영원한 독자'인 과거와 현재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기획자로, 편집자로, 서점 운영자로서 많게는 하루에 2~3권을 읽는 다독가. 좋아하면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며, 잘하게 되면 주변에서 찾는다고 했다. 때로는 노력이 재능을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