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석 경제부 차장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자."

1980~90년대 산더미 같은 외채를 안고 있던 남미의 한 나라에서 재무부장관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미국과 전쟁을 하자고 제안했다. 세계 최강국과 전쟁을 하다니,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자는 황당한 얘기였다. "미국과 전쟁을 하면 일주일도 못 가서 전 국토가 초토화될 것인데 제정신이냐"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재무부장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그렇다. 일주일도 못 돼서 패전한다. 그러면 그 뒤에는 미국이 외채를 탕감해주고, 경제 재건을 위한 대규모 원조를 해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미국은 2차 대전 후 유럽에 마셜 플랜이라는 대규모 경제 원조를 해줬다. 그래서 독일이 살아났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전쟁을 하면 경제를 재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다른 장관들도 "그럴듯한 아이디어"라고 맞장구쳤다.

오래전 들었던 조크다. 막다른 골목까지 몰려서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미국과 전쟁을 하자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는 수준이라고 남미 외채 과잉국의 무능한 정부들을 비웃는 뼈 있는 농담이었다. 제정신이 박힌 정부라면 외채 유예나 조정 협상에 나서면서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국민에게 호소해야 마땅하다.

요즘 조선업 구조조정에 대한 노조의 반발을 보고 있자면 이 농담이 농담 같지가 않다. 대우조선해양 노조는 지난 6월 중순 파업을 가결했다. 작년 10월 산업은행 등이 5조원대의 지원을 하기로 했을 때 "파업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그 노조다. "회사와 채권단이 노조와 협의를 한다면 파국을 막을 수 있다"고 엄포를 놓는다.

그 닷새 뒤에는 지난 3년간 자율협약 채권단으로부터 4조5000억원을 지원받고도 회생에 실패해 법정관리에 들어간 STX조선해양 노조가 "파업 투쟁이 가결됐다"고 선언했다. 일주일 뒤에는 삼성중공업 노동자협의회가 91.9%의 찬성으로 회사의 자구안 실행 계획에 반발하는 파업이 가결됐다고 을러댔다.

대우조선해양·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 등 세 회사가 주채권은행에 제출한 자구안은 최악의 상황이 5년간 지속된다면 최대 8만명의 인력 조정까지 하게 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파업한다는 것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며, 빨리 회사문을 닫게 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대우조선해양 사장의 말엔 제대로 된 상황 인식이 들어 있다. 노조원들이 선뜻 나서지 않아 아직은 큰 파업으로 번지지 않았지만, 불안 불안하다.

조선업 경기가 나빠진다는 경고음은 정부나 경영진만 들으면 되고, 노조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고, 노조원들이 무슨 책임이 있느냐고 주장한다면 잘못이다. 하다못해 동네 음식점 종업원들도 장사가 잘 안되면 주인 못지않게 걱정한다. 판촉물이라도 좀 돌려야 하는 것 아닌지, 아예 딴 일자리 알아봐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런데 큰 조선소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회사 형편이 이 지경인데도 "왜 내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느냐"고 하면 이상한 일이다. 파업으로 맞서겠다고 하면 더 이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