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키워드 정보] 여의도에 쏟아지는 '특별사면 민원']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약 150년 전 소설 '죄와 벌'을 발표했다. 가난하지만 똑똑한 대학생 주인공은 초인(超人) 사상에 몰두해 사회의 기생충과 같은 악덕 고리대금업자인 늙은 노파와 같은 사람을 죽여도 문제없다고 생각한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

살인 후 그는 기생충을 죽인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스스로를 죽이며 매춘부 생활을 하는 소녀를 보고 그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녀의 권유에 따라 자신의 범죄를 세상에 알리며 그는 구원받는 인간으로 재탄생한다. 이 소설은 인도주의를 다룬 인류 최고의 소설 가운데 하나다.

근대사회는 법치를 기본으로 한다. 즉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이 따라야 한다. 기소나 재판의 과정에서 범법자의 주관적 판단이나 동기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범죄행위에 대한 객관적 증거와 정황이 법을 위반하였는지를 실증적으로 따진다. 그래서 같은 죄를 지었으면 같은 벌을 받도록 하는 시스템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 모든 국가는 과거 중세의 군주가 베풀던 특별한 은혜, 즉 은전(恩典)의 현대판 모습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대통령 같은 국가수반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사법적 절차나 판단을 뛰어넘어 벌을 감해주거나 없애주는 사면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장치를 통해 최고 통치자는 자신의 정당성을 강화할 수 있다.

다가오는 8·15를 맞아 대통령의 특별사면이 예고되어 있다. "여러 가지 경제·안보 위기로 국민의 피로감이 누적된 상황이니 국민 통합적, 사회 포용적 분위기 진작을 위해 분야별로 규모 있는 특별사면이 필요하다"는 여당 원내대표의 건의를 대통령이 수용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대통령의 특별사면은 근대적 사법 체계와 충돌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혜택을 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불균형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면권 실행은 오·남용이 없도록 신중해야 한다. 잘못하면 화합을 위해 실시한 사면이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킬 수도 있다.

사면의 형평성 문제는 대상이 되는 범죄가 서민의 생계와 관련된 경우 상대적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여진다. 서민의 소소한 범죄에 대해 전과자 낙인을 떼어내고 새로운 출발의 기회를 주는 것이 국민 통합에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같이 포퓰리즘 정치가 난무하는 세상에선 생계형 범죄에 대한 사면도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왜냐하면 사면 대상자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마다 경쟁적으로 대상자를 늘리다 보면 사면이 법질서 자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반면 사면의 대상이 재력이 있는 사람인 경우에는 '무전 유죄, 유전 무죄'라는 비난이 바로 따라붙는다. 그렇기 때문에 재력가의 범죄에 대한 사면 역시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숫자는 많지 않아도 국민은 이 경우 법 적용의 형평성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예컨대 최근 사면을 기대하며 대법원 상고를 포기해 형이 확정된 CJ그룹 이재현 회장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지금 난치병으로 생사를 오가는 사투를 벌이고 있다. 주치의의 증언은 물론 외견만으로도 그의 고통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그래서 그가 이번 사면에 포함돼야 한다는 동정 여론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간 죄를 지은 기업인들은 잘못을 국민 앞에 무릎 꿇고 반성하기보다는 국가 경제에 자신의 기업이 얼마나 큰 기여를 하고 있는지를 내세우며 경영 차질을 거론하는 등 사실상 협박과 다름없는 사면 요구를 해왔다. 하지만 더는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사회의 기생충과 같은 사람을 죽였더라도 살인죄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와 '벌'의 다음 순서인 '사면' 또한 마찬가지다. 기업인에 대한 사면이 유전 무죄 논란에 빠지지 않으면서 인도적 차원의 개과천선은 물론 국가적 차원의 국민 화합이라는 대의를 얻기 위해서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깊은 반성이 최우선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이재현 회장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CJ그룹의 모기업인 제일제당을 창업한 이병철 회장 또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아무 조건 없이 기업을 국가에 헌납하여 기업 보국(企業 報國)을 실천한 전례가 있다. 그렇다면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 지금 '문화 융성'과 '창조 경제'의 접점에서 기업을 하는 CJ그룹이 보국할 일이 어찌 없겠는가. 보국할 기회를 갖기 위해서라도 통렬한 반성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