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시카고 화이트삭스 베테랑 타자 애덤 라로쉬(LaRoche·37)의 은퇴 소식으로 미국이 들썩였다. 연봉 155억원을 포기하고 그가 돌연 야구를 관둔 이유는 구단이 아들 드레이크(14)의 라커룸 출입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라로쉬는 트위터로 팬들에게 고별인사를 하면서 "#Familyfirst(패밀리 퍼스트·가족이 최우선)"란 의미심장한 해시태그를 달았다.

'일'보다 '아이'가 우선. 이젠 물 건너 얘기만이 아니다. 일에 통째로 삶을 헌납하는 걸 당연시하던 한국 아빠들이 변하고 있다. 남의 눈 의식해 뒷전으로 했던 아이 얘기를 당당히 꺼낸다. 자신만의 아빠표 세상 교육, '대듀케이션(DADucation)'을 하는 아빠도 늘고 있다.

아빠 열명 중 일곱, 교육 관심 많다

'더 테이블'이 지난 11일부터 5일간 자녀를 둔 30~50대 남성 100명을 설문한 결과 "자녀교육에 관심이 있느냐"는 질문에 '매우 관심 있다'가 29%(29명), '관심 있는 편이다'가 41%(41명)이었다. '관심 없는 편이다'는 6%(6명)에 그쳤고, '전혀 관심 없다'고 말한 응답자는 없었다. "회사동료나 친구들과 자녀와 관련된 이야기를 얼마나 나누는 편인가"라는 질문엔 '많이 하는 편이다'가 14%, '하는 편이다'가 37%였다. '안 하는 편이다'(10%)보다 훨씬 많았다. 직장에서 집안 얘기, 자녀 얘기는 금기시하던 시절과 격세지감 느낄 만큼 달라졌다. 3살배기 아들 아빠 이진영(33·회사원)씨는 "친구들은 주말에 골프 연습장 가면 '무조건 애 깨기 전까지 끝내기'가 원칙"이라며 "직장에서, 혹은 친구들 사이 육아 얘기는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이라고 했다.

소파와 물아일체? 아빠가 변했어요!

'나는 아이와 이렇게 시간을 보낸다(중복선택 가능)'는 설문에 1위는 'TV를 보거나 오락을 한다'(30.2%)였다. 그러나 나만의 소소한 '대듀케이션'을 찾는 아빠도 적잖다.

대기업 19년차인 김원재(45)씨는 주말마다 초등학생 딸 아영(8)이와 서점에 간다. 아이가 읽고 싶은 책을 한 권 고르면 일주일 동안 함께 그 책을 읽고 토요일 오전 집 근처 카페에서 감상을 서로 얘기한다. "딸이 처음 배운 사자성어가 물아일체(物我一體)였어요. 주말에 소파에 착 달라붙어 있는 저를 보고 아내가 '물아일체의 경지에 다다랐네'하고 핀잔 줬거든요." 그가 소파와 결별한 계기가 있었다. "시간 여행을 다룬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주인공이 10살로 돌아가 아버지와 백사장을 걷는 장면을 봤어요. 문득 우리 딸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겁이 나더군요."

김성현(39·중소기업 운영)씨는 아들 승준(8)이와 매달 실천해야 할 목표를 3가지씩 세우고, 달성하면 상장을 만들어 나눠갖는다. 부상(副賞)은 외식. 지난달 승준이가 세운 목표는 '세수할 때 물 받아서 하기' '하루 한번 다른 사람 칭찬하기' '일주일에 한 번 설거지 하기' 였다. 승준이는 아빠에게 세 가지를 제안했다. '11시 전에 집 들어오기', '술 대신 물 마시기', '일주일에 한 번 엄마 안마해주기'. "아들이 제안하는 '아빠의 목표'가 두려워요. 평소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이니까 심판받는 기분이에요.(웃음)"

대기업에 다니는 백기형(41)씨는 딸 혜인(11)·아들 건우(9)와 틈나는 대로 요리를 함께한다. "애들은 어른이 되고 싶어하잖아요. 음식을 같이 만들다 보면 아이들이 어른 일에 '동참'했다는 뿌듯함과 성취감을 맛보는 것 같아요." 미감(味感)도 생기고, 음식 맛은 결국 다양한 재료를 어떻게 쓴 결과물임을 보여주면서 과정의 중요성도 가르친다.

이철원 기자

IMF 겪은 아빠들이 대듀케이션 시작

아빠 육아의 변화를 주도하는 연령은 40대 초중반. 90년대 초중반 학번에 해당하는 이들은 풍요로운 대중문화를 경험한 X세대이면서, 1997년 IMF 외환 위기의 된서리 속에 '명문대=취직·출세 보장'이라는 방정식이 처음 흔들린 걸 경험한 세대다.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서 고도성장기가 끝난 뒤 취직난을 처음으로 겪었다. 92학번으로 1998년 졸업한 이상호(44)씨는 "윗학번 선배들만 해도 '골라서 입사한다' 했는데 우리 땐 뽑는 곳이 없었다. 운 좋게 취업 재수 끝에 대기업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는 "아들 세대는 지금보다 저성장이 더 심화되리라 본다"며 "학교 교육보단 세상살이 교육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 세대와 달리 우린 맞벌이가 익숙한 세대예요. 그런데 요샌 이웃 간 소통도 없고 주변에 친척도 없이 부부 둘이 전적으로 애를 키워야 하는 상황이지요. 아이 교육을 애 엄마에게만 맡기는 건 무책임하다고 봐요."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을 둔 강성욱(41)씨 얘기다. 설문에서 "자신이 몇 점짜리 아빠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50대 아빠는 평균 66점, 40대 아빠는 71.48점, 30대 아빠는 72.76점을 줬다. 30~40대는 점수가 거의 비슷했지만 50대는 상대적으로 점수가 박했다. 50대의 자녀 교육 참여도가 그만큼 낮다는 얘기로 해석된다.

아빠표 교육에 엄마들은 대환영이다. "아무래도 엄마들은 애 친구 엄마랑 만나면 귀가 얇아질 수밖에 없어요. '나만의 교육'이란 게 참 어려운데 아빠는 '엄마 네트워크'에서 멀어져 있으니 오히려 소신 있는 교육을 할 수 있어요. 결과가 성공일진 모르겠지만.(웃음)" 환희(11) 엄마 정민경(40)씨 얘기다.

아빠 교육, 자녀의 사회성 발달시킨다

전문가들은 엄마 교육과는 다른 빛깔의 아빠 교육이 아이의 균형적인 정서 발달에 도움을 준다고 입을 모은다. '아빠의 인성교육' 저자 김범준씨는 "아빠표 육아는 '몸'으로 '함께' 하는 놀이"라고 했다. "운동장에 공 하나 가지고 나가보세요. 뭐든 함께 해야 해요. 자기 점심값 아껴서 비싼 장난감 사줘도 같이 조립하지 않으면 의미 없어요." 푸름이교육 신영일 대표는 "사회성 발달은 아빠의 몫"이라며 "도전하거나 좌절을 견디는 힘을 길러주는 게 아빠의 역할"이라고 했다.

한국아동청소년심리상담센터 이향숙 소장은 양육을 운동 경기에 비유했다. "경기할 때 가까이에서 호흡하며 선수의 상태를 챙기는 건 '코치', 보다 넓은 시야에서 큰 그림 그리고 적재적소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책임지는 역할은 '감독'입니다. 가정에서 코치는 엄마, 감독은 바로 아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