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댕댕이 커여워 ㅋㅋㅋ."

직장인 이형원(36)씨는 최근 중학생인 조카의 인스타그램에 강아지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이 올라온 걸 봤다. 이씨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조카는 "멍멍이(강아지)가 엄청 귀엽다는 뜻"이라며 "글자를 멀리서 보면 안다"고 답했다. '댕'과 '멍', '귀'와 '커'가 써놓고 보면 모양이 비슷하게 보인다는 점에 착안한 조어라는 것이다. 이씨는 "별로 의미 없는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했는데, 자녀를 둔 친구들과 만났더니 다들 '요즘 애들하고 대화하려면 이런 표현을 알아둬야 한다'고 하더라"고 했다.

'커엽다(귀엽다)' '머머리(대머리)' '떼이스북(페이스북)' ' 재석(유재석)'처럼 얼핏 오타(誤打)나 오기(誤記)처럼 보이는 단어들이 인터넷을 넘어 일상생활까지 침투하고 있다. 이런 식의 신조어는 온라인에서 '야민정음'이라고 불린다. 온라인 커뮤니티 디씨인사이드의 '야구 갤러리(야갤)'라는 게시판에서 2014년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야민정음(야구갤러리+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야민정음은 방송과 SNS, 온라인 뉴스 댓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4월 인터넷 방송에 출연한 아이돌그룹 '러블리즈'는 한 멤버를 '머장(대장)'이라고 불렀다가 '방송에서 적절치 못한 언어 사용'이란 비난을 받았다. 지상파인 MBC 예능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도 '백주부(요리사 백종원의 별명)'가 종종 '뿌주부'로 불린다. '배'라는 글자가 'ㅃ'과, 'ㄱ'이 'ㅜ'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백'자가 '뿌'자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사용이 잦아지다 보니 야민정음을 번역해주는 애플리케이션도 등장했다.

야민정음은 단어의 뜻과 무관하게 글자 모양을 변형시켰다는 점에서 기존 인터넷 신조어들과 다르다. 지금까지는 '강추(강력 추천)' '멘붕(멘탈 붕괴)'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처럼 단어를 줄여 말하거나 'ㅇㅋ(오케이)' 'ㅋㅋ(크크)'처럼 초성을 딴 신조어가 많이 쓰였다.

야민정음을 바라보는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일부 네티즌은 "'일종의 언어유희'인데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아무 의미도 없이 멋대로 언어를 변형시켜 놓고 자기들끼리만 이해하는 행동이 불편하다"고 말한다.

야민정음이 표음문자(발음을 따서 만든 문자)인 한글을 파괴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대전대학교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 학생들은 지난해 12월 과제의 일환으로 야민정음 사례를 모은 타이포그래피(문자를 활용한 그래픽 디자인)를 제작해 캠퍼스 안에 전시했다가 한글 파괴 논란에 시달렸다. 전시회에 참여한 이진우(25)씨는 "'야민정음' 현상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를 제공하기 위해 준비했는데, 의도와 달리 '야민정음이 대학 캠퍼스까지 점령했다'는 식으로 퍼져 안타까웠다"고 했다.

김형배 국립국어원 연구원은 "언어에도 자정(自淨) 작용이 있기 때문에 이런 신조어도 유행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그라질 것"이라며 "다만 신조어를 빙자한 언어폭력은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전 대통령을 '이띵박 전 대통령'이라 부르거나 세월호 유가족을 ' 가족'으로 표현하는 것은 언어 유희를 넘어선 폭력이란 것이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새로운 세대가 '그들만의 언어'를 통해 정체성을 드러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면서도 "'놀이'와 '언어 파괴'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