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 시절 헌책방 앞을 지나다 보면 국어사전이나 영어사전은 대개 책방에서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찾는 사람이 많았다는 뜻일 게다. 중고(中古)라도 사전은 새것과 가격 차이가 크지 않았다. 환금(換金)이 보장되는 책이다 보니 용돈 궁한 친구들 중에는 멀쩡한 사전을 헌책방에 넘기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곤 집에 가서는 "잃어버렸다"며 또 용돈을 타냈다. 1970년대 초 정부가 사전을 '소비자 물가'를 측정하는 품목 중 하나로 지정했던 무렵 얘기다.

▶그때는 고등학교마다 "몇 년 선배 중에 누가 영어사전을 통째로 외웠다"거나 심지어 "사전을 씹어먹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곤 했다. 진위(眞僞)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사전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공부의 최종 완성 단계를 뜻하던 시절이었다. 위 세대 영문학자인 이상옥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글 중에 1950년대 서울대 영문과 신입생 환영회 풍경이 나온다. 학생들이 교수들께 대학에서 공부하는 법을 묻자 권중휘 교수가 답한다. "자네들이 앞으로 영문학을 하면 얼마나 하겠는가. 4년 동안 영어사전 보는 법이나 익히도록 하게."

▶사전은 지식 이상의 것이기도 했다. 1960년대 미국에 간 어느 한국 유학생은 후배 유학생들에게 짐 꾸릴 때 국어사전을 빼놓지 말라고 당부하곤 했다. 영어의 나라에 가 웬 한글사전인가. 그 유학생은 외롭고 막막할 때마다 사전 속 모국어 낱말들을 들춰보며, 때로는 사람 얼굴처럼 쓰다듬기까지 해가며,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소설가 이청준이 전한 얘기다.

▶"무슨 말인지 몰라/숨 막힐 때/너는 마침내/편히 쉬게 해준다/사전이여/날숨인 소리와/들숨인 뜻을 우리는/숨쉬며 살거니와/…/너를 펼치며/씨 뿌리고/너를 펼치며/거둔다"(정현종 '사전을 기리는 노래'). 그러나 시인이 이렇게 찬미하던 사전의 시대는 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종이 사전보다 편하고 빠른 스마트폰을 두드린다.

▶마침내 통계청이 45년 만에 사전을 소비자 물가지수를 결정하는 481개 품목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사는 사람이 드무니 종이사전 갖고는 물가를 얘기할 건덕지도 없어졌다는 말이다. 대세는 어쩔 수 없다. 그렇다 해도 사전이란 한 나라 문화의 높이를 재는 척도이다. 새로운 단어는 속속 생겨나고 같은 단어라도 뜻이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말이나 외국어를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롭게 정의(定義)하고 쓰임새를 정리하는 노력은 디지털 시대에도 누군가에 의해 계속돼야 한다. 정부도 지원을 아껴선 안 된다. 종이 사전은 황혼을 바라보지만 사전의 가치와 존재 이유는 달라지는 게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