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던 S가 영국인 남자 친구가 했다는 푸념을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인즉, 한국의 카페가 참 신기하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며 즐겁게 대화하기 위해 가는 곳이 카페인데, 사람들이 다들 공부를 하고 있어서 친구와 말하기가 영 눈치가 보인다는 것이다. S의 말을 듣고 나 역시 주위를 둘러봤다. 대부분의 사람이 정말 각종 참고서와 노트북 등등을 펴놓고 '열공' 중이었다. 주말 오후 3시 풍경이었다.

"똑똑하되 멍청하며, 언변은 좋되 무능하다. 시험 문제는 잘 풀되 삶의 문제를 대처하는 능력은 형편없으며, 남을 품평하는 데는 날카로운 날을 세우되 자신을 성찰하는 데는 무디기 짝이 없다. 하나를 배워 다른 하나에 적용할 줄 아는 게 아니라 다른 하나가 내가 배운 하나와 다르면 멘붕하고 열폭한다. 그건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울수록 무능해지고, 배울수록 화만 내는 처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럴수록 사람들은 더 '공부'한다. 공부만 한 것이 문제의 근원인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공부를 하는 격이다."

서울의 한 카페에서 사람들이 노트북 등을 펴놓고 ‘열공’ 중이다. 하지현·엄기호의 ‘공부 중독’은 ‘공부’를 핑계로 현실과의 직접 대면을 유예하는 우리 청년들의 모습을 짚어낸다.

정신과 의사 하지현과 사회학자 엄기호의 대담집 '공부 중독'을 읽다가, 이 문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 병리 현상 하나를 목도한 느낌이었다. 생각해볼 것도 없이 요즘 '공부'는 모든 걸 해결하는 만능 패스 열쇠다. 지금의 '공부한다'는 말의 뜻은 '준비'란 말과 연결되어 있고, 현실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유예시킨다. 청춘들은 대부분 '취준생'이거나 '입시생' '대학생'인 것이다. 마치 타석에 들어서지 않은 타자들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제 입시나 취업, 유학, 창업, 자격증 등을 준비 중인 사람, 즉 '공부 중인 사람'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제껏 공부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지표였다. 하지현에 의하면, 486세대까지는 자신의 부모보다 더 성공할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다. 그들은 정말 운이 좋은 시기에 태어나 성공했는데도, 본인들이 잘해서 성공했다고 믿는 세대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했던 방식을 복제해 아이들 역시 공부를 통한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는 이것이 대한민국 공부 중독의 본질 중 하나라고 말한다.

"TV 오디션 프로그램만 봐도 여기서 계속 주입하는 것이 '너는 아직 더 배워야 한다' 이거거든요. 온 시민을 학생으로 만들어 놓고 있어요. '내가 왜 아직 학생이냐' '내가 왜 아직 연습생이냐' 물으면, '네가 아직 준비가 덜 됐기 때문이다'라고 합리화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주체와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줘야 하는데, 그런 정도의 자리를 만들어낼 능력도 의사도 없는 사회 시스템이 절묘하게 만나서 기가 막히게 합의를 볼 수 있는 지점인 거죠."

사회학자 엄기호는 '준비가 안 되었다'는 말을 '그러니까 넌 아직 나오면 안 된다. 더 준비해야 한다!'는 통치 논리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불만이 '밖'이 아닌 '자기 안'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자리를 만들어주지 못하는 사회가 아니라 준비가 안 되거나 덜 된 자신을 탓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는 자칫 준비 안 된 사람이 사회에 나와서 하는 일을 '노동'이 아닌 '공부'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통념으로 이어져, 열정 페이로 둔갑한다.

이제 4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공부로 '유예된 삶'을 산다. 완전한 1인분이 되지 못한 채, 나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고 결함이 있다는 식의 태도가 사회 전체로 고착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현은 이런 심리의 본질이 더 나아가 사회 환경의 문제와 연결돼 '헬조선'과 '흙수저'로까지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공부에 인생을 통째로 걸다 보니 수능은 결국 '안 틀리기 경쟁'이 되고, 시험들은 대개 인재를 뽑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논란의 여지없이 채점을 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왜 이 답은 안 되냐?"라는 항의에 반박할 논리가 필요한 것이다.

"'내일로' 아세요? 25세 이하면 5만5천원 내고 닷새를 풀로 기차 타고 여행할 수 있는, 유로 패스 같은 게 생겼어요. 제가 3년 전만 해도 방에 콕 박혀서 놀고 있는 젊은이들한테 그걸 하라고 권했거든요. 근데 인터넷에 '족보'가 떠버린 거예요. 어디 가서 뭘 타고, 어디 가서 뭘 보고, 무슨 식당에서 뭘 먹고, 어딜 가면 샤워를 할 수 있고, 그래서 참 좋긴 한데, 이걸 알고 나면 다른 길을 갈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이게 뭔가 싶죠. 이런 족보가 뜨면서 누가 누가 얼마나 빨리, 효율적으로 이 코스를 다 도는가를 두고 경쟁이 붙는 거예요. 그러니까 동일한 루트를 똑같이 가요. 효율성이라는 이유로 디투어링이 줄 수 있는 여유를 찾지 못하게 되는 거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의외성'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이것 역시 사회 전반에 퍼진 '최적화'의 논리다. 사람들은 점점 시간 관리와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다 보니 의외성, 낯섦, 타자들을 지나치게 위험한 것으로 생각한다. 교육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가르칠 수 없고 배워야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르쳐야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미분과 적분은 가르치지 않으면 배울 수 없기 때문에 학교가 필요하다. 하지만 인성은 가르칠 수 없고 삶의 과정에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연애나 인간 관계 역시 '경험'이 아닌 '공부'로 배우는 사람이 늘다 보니, 점점 삶이 획일화되는 것이다. 엄기호에 의하면,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오히려 토론식 수업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들의 머릿속에는 어차피 토론이 끝나면 선생님이 정답을 말해줄 텐데, 어째서 토론으로 시간을 낭비하느냐는 논리가 박혀 있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매끄럽게 공부하는 것에 익숙해졌다'라고 표현한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 김두식·김대식의 '공부 논쟁'을 떠올렸다. 두 권의 책을 읽고 내가 느낀 것은 서로 맞닿아 있었다. 나는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공부'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한국 사회는 사람의 성장에 대해 '성공' 이외의 답을 줄 수 없는 무능력 상태에 빠져 있다. 우리는 앎이 교육으로, 부모가 학부모로, 시민이 소비자로 뒤바뀐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나 역시 의문에 빠졌다. 공부란 무엇인가. 아니, 질문을 바꿔야겠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진짜 공부란 무엇이어야 할까.

●공부 중독―하지현, 엄기호의 대담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