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은행 간 초단기 거래를 뜻하는 '콜'과 유사한 '돈주(신흥 자본가) 간 거래'가 이뤄지고, 대출 금액에 따라 이자를 차등 적용하는 것이 일반화하는 등 사(私)금융이 고도화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또 장마당(시장)에서 통용되는 중국 위안화 등 외화의 비중이 북한 화폐를 넘어서는 등 "북한은 이제 사회주의 계획경제라고 부르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에도 사금융 외에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식 은행이 있다. 중앙은행 격인 조선중앙은행이 전국에 지점을 두고 화폐 발행, 국영기업에 대한 자금 공급 외에 일반 주민들의 예금을 받는다. 하지만 한번 맡긴 돈을 찾기가 어려워 이용률은 낮다. 또 개인에겐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 이 때문에 북한에선 시장 발달과 더불어 사금융이 빠르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고무 대야를 머리에 인 북한 여성이 지난 22일 원산의 한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비포장 도로가에선 남성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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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호 한국수출입은행 북한·동북아연구센터 소장 겸 이화여대 교수는 28일 수은 창립 40주년을 맞아 열린 '북한의 금융: 실태와 과제' 세미나에서 "북한 경제는 성장하면서 붕괴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북한은 경제성장률 등 거시경제 지표는 개선되는 측면이 있지만, 시장이 없으면 경제 운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시장에 의존적인 경제가 됐다는 것이다.

조 소장은 "평양에만 택시회사 4~5곳이 광고전을 벌이며 경쟁하고, 우리로 치면 편의점에 해당하는 '황금벌 상점'이 밤 12시까지 영업하며, 평양시민들은 '손전화(휴대폰) 전자 상점'으로 불리는 온라인쇼핑몰을 이용한다"며 "시장이 커지고 다양한 생산물과 서비스가 나오다 보니 이 비즈니스들을 매개하는 사금융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희 산업은행 북한경제팀장은 "북한의 사금융 시장이 점차 체계를 갖춰가고 있다"며 "과거 무담보였던 대출이 월급이나 주택입사증(집문서 격)을 담보로 잡는 대출로 바뀌고, 대출 이자도 2000달러 미만은 월 10%, 그 이상은 4~7%로 금액에 따라 차등 적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돈주가 다른 돈주에게 시중 이자보다 싼 이자로 급전을 빌리는 등 (자본주의 국가들의) 은행 간 콜과 유사한 돈주 간 거래도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박영자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가장 주목할 게 송금 시장"이라며 "배급이 불안하다 보니 군대나 돌격대에 간 자녀에게 생활비를 보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더 나아가 북·중 간 또는 북한 내부에서 이뤄지는 상거래 결제 업무도 사금융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돈과 현물이 따로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현물은 사업 파트너 사이에서 직접 오가지만 돈은 '돈 장사꾼(전문 사채업자·환전상)' 등을 끼고 간접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는 "전문 돈 장사꾼의 규모가 북한 사금융 시장의 수준을 진단하는 데 중요한 지표"라고 했다. 2013년 기준으로 인구 약 70만명의 청진엔 100명 이상, 평양시의 한 개 구역(인구 20만~30만명)에는 100여 명이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돈주와 기업을 연결하는 돈 장사꾼 가운데 규모가 큰 사람을 '왕초'라 부른다"며 "이들은 개별 네트워크를 통해 전문가를 두고 대출 심사와 회수까지 하고 있다"고 했다.

북한 사금융의 활성화엔 시중의 풍부한 외화가 실탄 역할을 했다. 양문수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탈북자 대상 심층 면접 결과를 인용, "2013년부터는 장마당에서의 위안화 거래 비율이 북한 원화의 거래 비율을 추월했다〈그래픽〉"며 "급격한 '달러라이제이션(외화 통용 현상)'이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양 교수는 "2009년 화폐개혁은 주민들에게 북한 돈에 대한 신뢰를 접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며 "이후 대다수 사람이 외화를 사용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통용 화폐로 외화를) 사용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했다. 이어 "달러라이제이션은 여러 문제가 있지만, 돈을 돌게 해주고 물가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며 "북한 당국이 외화를 사용하는 레스토랑·수영장 등의 시설을 늘리는 것은 국내에 떠도는 외화를 흡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임을출 경남대 교수는 "달러라이제이션은 이제 되돌리기 어려운 현상"이라면서도 "외화 의존 심화는 국가 권위의 추락, 빈부 격차 확대 등을 초래하기 때문에 김정은 입장에선 북한 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모색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문성민 한국은행 북한경제연구실장은 "최근 국제사회의 강력한 대북 제재로 인해 북한 금융의 변화가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했다. 제재가 계속되면 외화 유동성 공급이 줄고, 돈주들의 투자도 위축되며, 북한 당국도 외화 흡수를 위해 시장 메커니즘을 활용하기보다는 통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정책 기조를 바꿀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