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열 산업1부 차장

요즘 기업인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힘들다고 한다. 엄살만은 아닌 듯하다.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라서며 국민에게 자부심을 심어줬던 조선업만 나락으로 떨어진 게 아니다.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불리는 삼성전자도 비상이다. 스마트폰의 미래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벤츠나 BMW와 경쟁하면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위상을 한껏 올려준 현대자동차도 요즘 위기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산다. 신흥 시장에서 매출 부진 때문만은 아니다. 다가오는 전기차 쇼크, 자율 주행차(일명 무인차) 쇼크가 그 실체라고 한다. 철강도 마찬가지다. '하면 된다'의 상징인 포스코는 중국산 철강의 공습만 두려운 게 아니라 미래 철강의 경쟁자로 떠오르는 탄소섬유 등 신소재가 실은 더 두렵다고 한다.

지난해 1조원에 육박하는 사상 최대 이익을 올린 한 중견 그룹의 관계자는 "요즘 회사 내에서 웃고 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다. 작년의 호황이 올해도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는 데다 무엇보다 경쟁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는 사업 환경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오랜 기간 고유가에 시달려온 항공사 경영진 얘기도 마찬가지다. "지난 몇 년간 실적 부진의 주요 원인으로 고유가를 꼽았다. 그러데 이제 저유가 시대가 됐는데도 실적이 회복되지 않는다. 항공 시장의 판(板)이 바뀌었다는 걸 몰랐는데, 고유가 장막이 사라지니 확연히 보였다." 물론 이 항공사도 저가 항공사가 떠오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도와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는 고백이다.

그렇다. 요즘 기업들이 겪는 위기의 공통분모는 저마다 모든 분야에서 판이 바뀌는 변화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판이 바뀐다는 것은 순식간에 꼴찌가 일등으로, 일등이 꼴찌로 자리바꿈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우리는 최근 수년간 그런 변화를 여러 차례 목격했다. 애플이 스마트폰을 내놓던 2007년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칭송받던 노키아가 한방에 훅 날아가 버렸다. 미국 대표 자동차 기업 크라이슬러가 이탈리아에 팔려 갔고, 영국의 자존심 재규어가 인도에 넘어갔다.

이처럼 판이 바뀌는 국면을 마냥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우리가 잠시 잊고 있을 뿐 우리가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판을 바꾸는 혁신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조선업만 봐도 '육상건조공법' '메가블록공법'같은 기술은 우리가 전 세계 조선업의 판을 바꿔 버린 신기술들이었다.

물론 지금의 판이 바뀌는 변화는 더욱 거칠고, 강도(强度)가 무시무시하다. "계속된 안정은 역사적으로 아주 예외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리더는 변화와 혁신이 사라지는 세상이 올 것이란 근거 없는 희망을 버리는 사람이다." 경영학 구루(guru· 스승) 피터 드러커의 말이다. 우리가 직면하는 위기의 본질은 판이 바뀌는데도 기득권을 지키려 한다거나 위기를 관리 능력만으로 모면할 수 있다고 인식하는 것일지 모른다. 판을 바꾸겠다는 도전이 보이지 않는 게 진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