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박정희 대한민국 전 대통령은 누구?]

일찍이 베버는 개신교 종파인 캘빈주의 예정설 때문에 구원 가능성에 대한 불안을 견디지 못한 기독교 신자들이 현세에서 생활을 근면 성실하게 영위함으로써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본의 아니게' 성립시켰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베버의 이 주장은 같은 캘빈주의 국가면서 동시에 당시 경제적으로 가장 앞서 있었던 네덜란드공화국을 제치고 상대적으로 후진이었던 영국이 왜 산업화에 먼저 성공하였는지를 분명히 설명할 수 없다.

이 쟁점을 근거로 세계사 경험으로 볼 때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동력은 근검절약이라는 종교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의 동기가 아니라 국가 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국민적 차원의 경제적 동기 즉 '경제적 민족주의'라는 주장이 최근 등장했다. 그린펠드와 라이너트 등이 주도하는 이 분석은 경제 발전의 역사에서 관찰되는 민족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에 특히 주목한다.

실제 경제 발전 역사는 선진 국가에서 후진 국가로 발전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간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경제 발전은 매우 역동적 추격 과정을 동반해 왔다. 예컨대 영국은 뒤처진 가운데 출발하여 민족주의를 배경으로 앞서 있던 네덜란드 경제를 따라잡고 결국에는 추월했다. 이후 프랑스·독일·미국·일본의 영국 추격도 마찬가지 모습을 보여 주었다. 상대적으로 최근에는 한국과 중국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프로테스탄티즘 가설이 분석하는 자본주의 정신의 '우연한' 성립과는 달리 민족주의 테제는 근대 경제가 요구하는 사회 구조 유형을 '필연적'으로 촉진한다. 왜냐하면 대외적으로 경쟁하는 민족주의는 대내적으로 평등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경쟁에서 패배하지 않으려면 내부 위계를 흔들어 전통적으로 무시당하던 직업, 특히 이윤 추구를 지향하는 직업의 지위를 상승시켜야 한다. 그래야 국력을 키워서 대외적 경쟁을 할 수 있다.

민족의식을 기초로 한 자본주의 정신의 성립은 나라마다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 따라 조금씩 달리 나타난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을 거치며 영주들의 봉건적 특권을 폐지하고 모든 시민이 세금을 부담하는 '국민 국가'로 진입했다. 독일은 결정적 계기가 비스마르크 체제를 뒷받침한 민족주의 경제사상이었다. 일본은 전통적 '경세제민' 이념에 따라 구미 열강을 따라잡고자 한 메이지유신이 결정적 계기였다.

한국은 '민족중흥' 또는 '조국 근대화'와 같은 민족주의적 이념과 목표가 등장하고 나서야 지속적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1963년의 책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땀을 흘려라! 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노래로 듣고 (…) 이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고 하며 "우리는 일을 하여야 한다. 고운 손으로는 살 수가 없다"고 특권층을 향해 외쳤다. 이어서 그는 "기름으로 밝히는 등(燈)은 오래가지 못한다. 피와 땀과 눈물로 밝히는 등(燈)만이 우리 민족의 시계(視界)를 올바르게 밝혀줄 수 있다"고 선언하며 고운 손에 대한 민족적 동참을 요구하고 있다.

이후 한국의 경제적 민족주의는 '우리도 잘살아보세'라는 구호에서 출발해 '일본인도 하는데 한국인이 왜 못하나' 하는 일본 따라잡기로 구체적 모습을 드러냈다. 나아가서 경제적 민족주의 의식은 기업인에게 국가와 민족 공동체에 대한 의무로서 해외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국제 경쟁력을 가진 기업 육성을 요구했다. 민족주의라는 가치 속에서 한국의 기업은 국가의 대표 그리고 국민의 대표로 해외시장에서 경쟁하며 기업보국이라는 가치를 실현하는 과제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화가 넘치는 오늘날에도 민족주의는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준다. 며칠 전 세계경제를 공황으로 몰아넣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좋은 예다. 유럽연합에 지불하는 영국의 엄청난 분담금이 꼭 필요한지 나아가서 골치 아픈 이주 노동을 수용할 필요가 있는지를 회의(懷疑)하는 영국 민족주의의 부활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트럼프 또한 국가주의를 배경으로 위대한 미국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전략으로 대권을 넘보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갈파한다. "자본주의라는 경제 제도, 나아가서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가 특정한 국가에서 본격적으로 작동하려면 그 기능을 원활하게 해 주는 전통적인 문화적 가치와 관습을 역사에서 부활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합리적 계산은 필요조건이고 문화적 전통에 바탕을 둔 호혜성, 도덕률, 공동체에 대한 의무, 신뢰 등이 더해져야 한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앞둔 오늘 상황은 그를 역사로 묻어 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불러내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