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식민사학의 왜곡은 한국사의 다방면에 걸쳐있는데 고대 한·일 관계사도 그중 하나이다. 한반도의 남부를 일본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직접(가야), 혹은 간접(백제·신라) 지배하면서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고구려와 승부를 벌였다는 이른바 '남선(南鮮)경영론'은 임나일본부설과 쌍둥이 꼴이다. 광복 이후 남한과 북한의 역사학계는 식민사학의 이런 주장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북한 학계의 노력은 김석형의 분국설(分國說)로 정리되었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주민들이 일본열도에 집단 이주하여 분국을 건설하였고 이 분국들과 야마토 정권의 관계가 일본서기에 기록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한반도 주민들이 일본열도 곳곳에 정착하고 국가를 경영했다는 주장이다.

남한 학계는 역사서와 광개토왕릉비·칠지도 등 금석문 자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큰 힘을 발휘한 것이 고고학적 연구이다. 1970년대 이후 고령·부산·합천·함안에 있는 왕릉 조사가 진행되면서 가야의 정치적·문화적 발전 수준이 야마토 정권은 물론이고 백제나 신라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야마토 정권이 가야를 지배하였다는 물질적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가야의 갑옷과 마구(馬具), 단단한 최고급 토기(도질토기)가 전해져서 일본의 고대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음도 알게 되었다. 일본인 연구자들도 임나일본부의 허구성을 인정하게 되었고 남선경영론도 소멸됐다.

광주광역시 월계동의 전방후원분. 왼쪽은 길이 45m, 오른쪽은 35m로 6세기 초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산강 지류 구릉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93년과 95년 발굴 결과 전방후원분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불거졌다. 영산강 유역에는 장고형 무덤이라 불리는 특이한 형태의 무덤이 10여 기 분포하는데 1990년대 이후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앞은 네모나고 뒤는 둥근 무덤)과 구조·장법(葬法)·부장품에서 공통성을 지니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후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한·일 학계의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됐다. 일본 전방후원분의 기원이 영산강 유역이란 학설도 국내 연구자에 의해 제기됐다. 하지만 일본에서 전방후원분이 등장한 시기가 3세기 후반인 데 비해 한반도는 가장 이른 것이 5세기 말이란 점에서 무리한 해석이다. 일본열도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이 4800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전방후원분은 일본적인 묘제(墓制)로 보는 것이 순리이다.

이런 무덤이 한반도 영산강 유역에 등장한 배경과 묻혀 있는 인물에 대한 양국 학계의 해석은 '철(鐵) 자원을 구하기 위하여 한반도에서 활동한 왜의 무장(武將)' '일본에서 출생하였지만 백제를 위하여 활동한 왜계(倭系) 백제 관료' '영산강 유역의 지배층이 묘제만 도입한 것에 불과' 등 다양하다. 게다가 전방후원분 이외에도 돌방의 구조와 장법·유물 등에서 일본적인 냄새를 풍기는 유적과 유물이 한반도 남해안 곳곳에 분포하는 사실이 밝혀져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 있는 백제왕 신사.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한 의자왕의 후손들이 선조를 모신 곳이다.

하지만 이는 일본열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백제·가야·신라계 문물의 양에 비하면 매우 적다. 고대 일본이 선진 문물을 수입하던 창구인 북부 규슈(九州)나 야마토 정권의 심장부인 기나이(畿內) 일대에는 한반도 주민들이 이주·정착한 흔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일본에서는 이들을 '도래인(渡來人)'이라고 부른다. 5세기 이후 일본열도의 정치적인 지형이 크게 바뀌게 된 계기가 이들의 이주라고 인정하고 있다. 심지어 오사카의 다카이다야마(高井田山) 고분은 백제 왕족 부부가 묻힌 것으로 인정될 정도이다.

당시의 역사적 실상은 한반도의 국가들과 일본열도의 복수의 정치체 간에 진행된 다자간 교섭이었다. 한반도 남부 주민의 대규모 일본열도 이주와 정착이 큰 흐름이었고 일본열도 주민의 한반도 왕래와 이주도 일부 존재했다. 이것이 고대 한·일 관계사의 실상이다.

공동 기획: 한국고대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