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식 부국장 겸 사회부장

[오바마 "자생적 테러... 외부 지시 증거 없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말[言]의 달인’이다. 그의 언변(言辯)은 정적들도 인정하는 수준이다. 그런 오바마에게도 사흘 전 기자회견은 악몽(惡夢)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를 백악관 기자회견장으로 불러낸 것은 미국 플로리다주(州) 올랜도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50명이 죽고, 50여명이 중경상을 입은 최악의 ‘총기 테러’가 벌어진 지 8시간여 만에 오바마는 백악관 기자회견장 연단 앞에 섰다.

그는 미리 준비해온 성명서를 읽은 뒤 쏟아지는 질문을 뒤로 한 채 회견장을 떠났다.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고 평소 즐겨 쓰던 화려한 수사(修辭)나 감성 어린 웅변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오바마는 이미 7년여 재임(在任) 중 1년에 두 번꼴로 총기 난사 관련 대(對)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언론 집계에 따르면 '최소 14번' 이상 희생자를 위로하고 재발 방지를 향한 결의(決意)를 밝혔다는 것이다. 지난 1년만 따져도 무려 6번이나 똑같은 일로 기자회견을 가졌다. 미국 언론들은 동어반복(同語反復)에 가까운 14번의 '오바마 총기 난사 사건 관련 회견'을 하나로 묶은 동영상 코너를 만들어놓기도 했다.

이 기록만 놓고 보면 오바마는 '실패한 대통령'이다. 다른 일도 아닌 '시민 안전(安全)' 문제에서 속수무책의 모습을 보여 왔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임기가 7개월여밖에 남지 않은 오바마의 지지율은 50%대를 넘나든다.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얼마 전 오바마가 자신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며 반겼다. 레임덕에 접어든 오바마의 인기와 정치적 영향력이 여전한 셈이다. 총기 난사 사건이 이어지는데도 그렇다.

사실 미국에서 이 문제는 대통령 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기 어렵다. 미국은 전 세계 테러리스트들의 첫 번째 목표물이다. 올랜도 사건의 주범처럼 불만과 증오로 가득 찬 '외로운 늑대'의 등장을 막기도 쉽지 않다. 이런 미국에서 총기 소유는 헌법상 보장된 권리다. 더욱이 미국총기협회(NRA)의 로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 총기 소유·유통을 규제하려는 오바마의 입법(立法) 시도는 번번이 의회의 벽 앞에서 좌절했다. 미국인 다수도 당장 총기 소유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미국은 불안·공포와 공존할 수밖에 없는 사회다.

이런 불안과 공포는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와 벨기에 브뤼셀 등이 잇단 테러의 표적이 됐다. 이 시대 이런 공포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 작년 말 11월 세계 각 도시와 국가의 통계를 비교·조사하는 한 기관이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꼽았다. 테러리스트의 직접 공격을 받은 적이 없고, 총기 소유가 금지돼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전혀 다르게 느끼는 듯하다.

한국에서 안전 문제는 역설(逆說)의 연속이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은 늦은 밤에도 대도시를 활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에 대해 찬사를 보내곤 한다. 필자도 이런 얘기를 여러 번 들었다. 전 세계에서 마음 놓고 밤길을 걸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한 달여 우리 사회에서는 '불안'과 '공포'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인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피살됐고, 학부모까지 포함된 남성들에 의해 여교사가 성폭행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새벽 등산길에서 중년 여성을 노린 강도·살인 사건도 연거푸 터졌다. 그러자 정부·지자체가 앞다퉈 화장실 안전 문제를 들고 나왔고, 곳곳에 방범용 CCTV를 늘리겠다고 했다.

우리 공공 기관이 설치한 CCTV는 작년 말 현재 65만5000여대다. 매년 10만개 이상씩 늘었다. 민간 CCTV까지 합치면 인구(人口)당 세계 최다 수준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리나라 화장실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깨끗하고 안전하다고 자부할 만하다. 그런데도 화장실을 뜯어고치고 CCTV를 늘리겠다는 식의 졸속 처방만 쏟아낸 것이다.

총기 테러 방지에 거듭 실패한 오바마나 잇단 테러 공격으로 충격에 휩싸인 파리가 찾은 해법은 일상(日常)의 회복이었다. 위선처럼 들리더라도 ‘관용과 화해’를 외쳤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불안 지수가 커진 것은 바로 이렇게 사회를 이끌어갈 리더십의 부재(不在) 때문이다. 당장은 여론의 뭇매를 맞더라도 ‘서울의 밤길은 안전하다’고 외치는 리더를 보고 싶다. 그러나 지난 한 달여 범죄 피해자를 향한 추모 행렬 앞에서 여(與)는 침묵했고, 야(野)는 분노의 불길을 키울 궁리에 골몰했다. 언론의 책임 역시 적지 않다는 점에서 필자도 깊이 반성한다. 오늘 저녁 서울의 밤길을 혼자라도 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