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충북 괴산경찰서는 충북 한 마을에서 A(여·80)씨를 살해한 혐의로 S(58)씨를 긴급 체포했다. S씨는 지난달 16일 혼자 살고 있던 A씨 집에 들어가 A씨를 목 졸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S씨를 조사하던 경찰은 이 마을에서 6년 전에도 비슷한 수법의 범행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여죄를 캐던 경찰은 며칠 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부터 "6년 전 사건의 범인은 S씨이거나 S씨 부계(父系) 혈족일 가능성이 크다"는 통보를 받았다. 국과수가 이렇게 추정한 근거는 바로 6년 전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Y염색체였다.

동일범이거나 먼 친척이거나

6년 전인 2010년 10월, 이번에 살해된 A씨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70대 할머니 B씨가 성폭행을 당했다. 범인은 혼자 살던 B씨 집에 침입해 B씨를 성폭행하고 불을 지른 뒤 도망갔다. B씨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집 밖으로 나와 목숨을 건졌지만 범인 얼굴은 기억하지 못했다. 단서는 피해자의 몸에 남은 범인의 DNA뿐이었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 미제(未濟)로 남아있었다.

이번에 체포된 S씨를 조사하던 경찰은 6년 전 사건과 이번 사건이 같은 마을에서 벌어졌고 범행 대상과 수법도 비슷한 점에 주목했다. 경찰은 S씨의 DNA를 채취해 6년 전 사건 현장에서 확보한 DNA와의 분석을 국과수에 의뢰했다. 국과수는 "S씨와 6년 전 사건 범인의 Y염색체가 일치한다"고 했다. 6년 전 현장에서 채취한 DNA는 남자와 여자 DNA가 섞여 있어, 남자에게만 있는 Y염색체 분석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찰은 S씨에게 B씨 성폭행 혐의를 적용하지 못하고 A씨 살해 혐의만 적용했다. S씨가 혐의를 적극 부인하는 데다 Y염색체가 같다는 이유만으로는 S씨를 범인으로 단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DNA가 일치하면 동일범이라는 증거가 되지만 'Y염색체 일치'로는 범행을 입증할 수 없었다.

남자 성염색체 XY 중 Y염색체는 부계(父系)를 통해 전해진다. 성염색체는 나머지 22쌍의 상염색체와 달리 전달 과정에서 거의 재조합되지 않아 유전성이 강하다. 즉 S씨의 Y염색체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아버지의 Y염색체와 일치한다. 이런 식으로 S씨의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도 같은 Y염색체를 보유하게 되며, S씨의 형과 동생도 동일한 Y염색체를 갖게 된다. 한 조상을 모신 후손들, 즉 본관(本貫)이 같은 성씨들은 모두 동일한 Y염색체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숭덕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돌연변이 유전자로 인해 Y염색체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지만 극히 드물다"며 "과학적으로는 S씨가 범인일 가능성과 그의 아버지나 형제가 범인일 가능성, S씨의 아주 먼 친척이 범인일 가능성이 같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사건이 발생한 지역은 S씨 집성촌이었다. 경찰은 충북의 다른 동네에 사는 S씨의 형과 동생을 조사했지만 별다른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괴산경찰서 관계자는 "6년 전 사건인 데다 S씨 혈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용의자로 몰 수도 없어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했다. Y염색체가 범인의 범위를 좁혀주긴 했지만 사건의 완벽한 단서가 되진 못한 것이다.

범인 성씨 알려주는 Y염색체

Y염색체가 범인 검거에 결정적 역할을 할 때도 많다. 2008년 7월 경북 김천의 한 술집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사건 당일 오후 50대 여주인을 성폭행한 후 흉기로 찔러 죽이고 사라졌다. 경찰은 피해자 몸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타액을 발견해 유전자 정보를 확보했다. 그러나 용의선상에 올라있는 사람들 중에서 DNA가 일치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수사가 답보상태에 빠질 무렵, 의외의 곳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당시 유전자 분석을 맡았던 국과수는 "범인의 성씨가 위씨일 가능성이 크다"고 알려왔다. 2008년 통계청 기준 우리나라에서 위씨 성을 가진 인구는 2만8675명이었다. 이 중 남성, 경북 지역, 사건 현장을 중심으로 한정하면 범위는 더 좁혀질 수밖에 없다. 수사팀은 사건 현장 근처에 사는 위씨 성을 가진 남성들을 대상으로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범행 현장에서 채취한 DNA와 일치하는 40대 남성을 찾아냈다. 자칫 미제 사건으로 남을 뻔한 이 사건의 일등공신은 Y염색체였다. 조상이 같은 남자 후손들은 같은 Y염색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DNA 비교 분석으로 성씨 추정이 가능했던 것이다. 희귀 성씨의 경우 Y염색체를 통해 용의자 범위가 크게 줄어드는 효과도 있다.

Y염색체를 통한 성씨 추정이 처음으로 이뤄진 건 2007년 대전에서 벌어진 다방 여종업원 살인사건 때였다. 국과수는 당시 범죄 현장에 남은 DNA와 국과수가 보유하고 있던 1000여명의 DNA를 대조한 결과 범인의 Y염색체가 오씨 성을 가진 남자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오씨 집성촌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재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경찰은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점퍼 속에서 안약을 발견해 병원 처방전 기록을 뒤지던 중이었다. 수사 대상이 2000여명으로 너무 많았던 상황에서 범인의 성씨를 알게 되면서 수사에 큰 진전이 이뤄졌고 사건 발생 80여일 만에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다. 그는 예상대로 오씨였다. 2012년 청주 해장국집 살인사건, 2014년 경북 칠곡 낙동강변 살인사건 등도 Y염색체를 통한 성씨 추정이 범인 검거에 도움을 준 경우다.

원래 Y염색체 분석은 성범죄 증거 분석을 위해 등장했다. 이숭덕 교수는 "피해자 DNA와 범인 DNA가 혼합돼 검출되는 성범죄 관련 증거물의 경우 Y염색체 분석이 특히 유용하다"고 했다. 2000년대 DNA 분석 기술이 발달하고 관련 데이터베이스가 쌓이면서 Y염색체와 성씨를 연결할 수 있게 됐다. 해외에서도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Y염색체 분석이 꼭 범죄 수사에만 쓰이는 건 아니다. 2013년 한 남성은 골프장 예정 부지에 있는 묘가 자신의 조상묘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국과수에 Y염색체 분석을 의뢰하기도 했다.

보조 증거로만 채택해야

그런데 Y염색체를 통한 성씨 분석엔 한계가 있다. 유전자를 분석해서 유추한 성씨와 실제 범인의 성씨가 일치하는 건 60% 정도뿐이라고 한다. 조상 중에 원래 성씨가 아닌 조상이 끼어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이씨 가문이 조선시대 전주 이씨 족보를 사들여 성을 바꿨거나 배우자가 외도를 통해 다른 성씨의 아들을 낳았거나 다른 성씨 아이를 입양했을 경우, 후손들에겐 당연히 전주 이씨 Y염색체가 없다. 또 현행법상 본관별로 DNA 정보를 관리할 수 없기 때문에 본관이 다양하고 인구도 많은 김·이·박 등 성씨에서 Y염색체 성씨 추정 기법은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DNA로 범인을 특정하는 것을 윤리적인 차원에서 경계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크다. 국과수 관계자는 "성씨가 같지만 Y염색체가 다를 수 있고 성씨는 다르지만 Y염색체가 같을 가능성이 상존한다"며 "다른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는 강압수사가 될 수 있는 만큼 보조 증거로만 채택해야 한다"고 했다.

경찰에서도 성씨 추정은 공식적 수사 방법은 아니다. 한 경찰 관계자는 "경찰 전체에 알려진 방법이라기보다는 현장 수사를 하는 일부 경찰만 알음알음 정보를 아는 정도"라고 했다.

법원에서도 Y염색체 관련 수사 내용은 참고할 뿐 결정적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다. 2004년 거제에서 발생한 다방 여종업원 살인사건이 그랬다. 당시 검찰은 피해자 손톱 밑에서 발견된 Y염색체와 일치하는 남성을 범인으로 기소했다. 1심 법원은 '용의자 가운데 피고인의 Y염색체가 유일하게 피해자에게서 추출된 것과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2심 법원은 '한국 남자 중 피고인만이 사건 현장과 동일한 Y염색체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판결도 2심 법원과 같았다.

국과수도 성(姓)을 지목하는 걸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자칫 특정 성씨를 범죄자로 몬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과수 관계자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이고 제한적인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며 "일반 사건보다는 DNA 외에는 단서가 없는 장기 미제 사건 등에 적용해 볼 만하다"고 했다.

작년 말 현재 국과수는 범죄 현장에서 채취한 8만7000건, 강력범 피의자 4만8000건의 DNA를 보관하고 있으며, 검찰은 수감 중인 범죄자 10만여건의 DNA를 관리하고 있다. 범인 검거와 수사 등을 위해 DNA 채취 대상을 늘려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인권침해 등의 이유로 채취 대상을 오히려 제한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