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논설주간

김영삼 대통령 집권 시절 누가 "김 대통령에게 노벨 의학상을 줘야 한다"고 해서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죽은 김대중·김종필을 살려내지 않았느냐"고 했다. 김 대통령의 정치적 오판과 실책이 대선에서 두 번 연거푸 지고 정계를 '은퇴'한 김대중과 존재가 희미해져 가던 김종필을 다시 살려주었다는 얘기였다.

그런 노벨상이라면 이번에 새누리당이 또 한 번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총선 몇 달 전만 해도 유권자들 사이에 정권 심판론과 야당 심판론이 비슷했다. 모든 선거는 특히 정권 중간에 치르는 선거는 정권 심판론으로 시종(始終)하기 마련이다. 총선에서 '야당 심판론'이라는 주제가 등장한 자체가 예외적 현상이었고 더구나 때로는 정권 심판론을 능가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것은 국회선진화법을 악용해 국회를 점령하고 국정을 마비시킨 야당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얼마나 커져 있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많은 국민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저 야당에 한번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게다가 야당은 분열까지 됐다. 한쪽엔 친노라는 강경 극성 집단이, 다른 쪽엔 공천받을 자신이 없어진 사람들이 모여 국민과는 아무 상관 없는 싸움을 계속했다. 야당 심판론이 정권 심판론 못지않게 커져 있는 비상 상황에서 표까지 나눠 먹게 됐다면 그 선거가 어찌 될 것인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선거 승패를 가른다는 '구도'와 '바람' 두 가지 모두가 야당 필패로 가고 있었다. 두 야당 공히 "개헌 저지선(3분의 1)이라도 지키게 해달라"고 읍소한 것은 결코 엄살만이 아니었다. 실제 상당수 야권 인사들은 선거 패배를 기정사실화하고 '그 이후'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런 야권을 여권이 죽음에서 살려냈으니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노벨 의학상'을 받을 만도 하다.

야권도 제힘으로 살아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매를 맞게 돼 있었는데 남이 엉뚱한 짓을 하는 바람에 매가 그쪽으로 돌아가 버렸다. 종아리를 걷고 죽을 표정으로 서 있었지만 비명이 옆에서 터진 것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종아리가 멀쩡해서 좋다고 환호하는 게 지금 야권 모습이다.

맞아야 할 매를 맞지 않은 아이는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야권이 지난 4년간 해온 무책임한 발목 잡기로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상(賞)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국정이 흘러갈 방향도 그쪽으로 틀어지게 된다. 엊그제 야 3당이 모여 "여소야대의 현실을 청와대와 새누리당에 확실히 보여주겠다"며 내세운 것은 국가 구조 개혁의 청사진이 아니라 세월호특별조사위 연장과 각종 정치 청문회 개최였다. 사상 최악이라는 19대 국회 때 하던 그대로 또 하겠다는 것이다.

여당이 몰락하다시피한 이번 수도권 총선에서 특이한 지역구가 두 곳 있었다. 야당 우세 지역으로 꼽히는 경기도 안산에서, 그것도 세월호 사건의 피해 지역인 안산 단원구의 두 곳 선거구에서 모두 여당이 승리한 것이다. 바로 옆 수원에서 여당이 5곳 다 전멸한 것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현상이었다. 세월호 문제가 본질에서 벗어나 한풀이와 정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데 대한 염증이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반여(反與) 바람까지 능가한 것으로 생각한다. 야당 눈엔 이게 보이지 않는다. 맞아야 할 매를 맞지 않으면 분별을 잃기 쉽다. 분별을 잃으면 제일 먼저 눈이 어두워진다.

최근 우리 사회에선 여러 이상(異常) 현상이 빈발하고 있다. 정신병자의 범죄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이것이 크든 작든 붐을 이루는 것이 한 예다. 늘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사건·사고에도 과도한 반응들이 나타난다. 일각의 분위기에 정치인이 끼어든 것이라고 해도 사회 바탕에 쌓인 불만·불안을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다. 이 흐름은 예상 밖의 총선 결과를 타고 점점 큰 바람을 만들어낼 것 같다. 왠지 이 바람에서 계절의 변화까지 느껴진다. 계절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 아무리 반기문이라고 해도 넘어가는 계절을 세우기는 쉽지 않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맞을 매를 맞지 않고 넘어간 야당, 그래서 반성과 성찰이 없는 야당이 집권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야당 앞에 국민의 희생이 필요한 구조 개혁의 큰 과제가 놓이게 된다. 한국 경제의 운명이 구조 개혁에 달렸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구조 개혁엔 고통이 따른다. 야당은 '고통'만 대변한다면서 구조 개혁을 막아왔다. 그것으로 벌을 받아야 했는데 상을 받았으니 집권 후엔 어떻게 할까. 대통령과 여당은 희한한 '노벨 의학상'을 받고 야당은 '어부지리상'을 받았는데 경제 위기, 북핵 위기 속의 국민에겐 과연 어떤 상이 돌아오게 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