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래 산업2부장

미국 금융 위기가 터진 직후인 2009년 1월, 오바마 신임 대통령은 경제 회생을 주도해야 할 재무부 장관에 당시 47세의 티머시 가이트너 뉴욕 연방준비은행장을 임명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벤 버냉키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같은 석학(碩學)도 아니었고, 대통령의 경제 브레인인 래리 서머스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민주당원도 아니었다.

그의 첫 기자회견은 실망 그 자체였다.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데다 목소리마저 가늘고 떨리자 실망한 투자자들이 투매에 나섰다. 이 여파로 미국 주가가 5%나 하락했고 위기의 금융주는 11%나 폭락했다. 언론은 '가이트너는 진정한 재난거리' '오바마 대통령은 벌써 실패하는가'라고 조롱했다. 심지어 그를 지지하는 의원들조차 "유대교에서 성인식을 치르는 13세 소년 같다"고 혹평했다.

하지만 가이트너 장관은 금융 위기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현장 경험을 갖고 있었다. 미국 재무부와 IMF(국제통화기금)에 근무하면서 1990년대 멕시코와 일본·태국·인도네시아·한국 등 신흥국들이 금융 위기를 겪을 때마다 실무 책임자로 투입됐다. 2008년 9월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대공황급 위기가 촉발된 이후에는 벤 버냉키 FRB 의장, 헨리 폴슨 당시 재무부 장관과 함께 부실 금융기관을 정리하고, 7000억달러(약 827조원)짜리 구조 금융 프로그램을 출범시켜 미국 경제를 되살리는 기반을 마련했다. 임기 말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당신이야말로 핵심 인재"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이렇게 보면 오바마 대통령은 정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최고의 전문가를 경제 회생의 수장(首長)으로 앉힌 것이다.

가이트너의 자서전 '스트레스 테스트'를 읽어보면 그가 구조 금융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여론과 정치권의 엄청난 압박에 시달렸다는 사실이 곳곳에 나타난다. 하지만 그에게는 분명한 원칙이 있었다. 망가진 미국 금융 시스템 회복을 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7000억달러짜리 초유의 구제금융과 관련해 "국민이 낸 세금으로 부패한 월스트리트를 구제하려 든다"는 비판이 빗발쳤지만, 그는 "압도적인 힘을 쓰는 것이 일시적인 절반의 대책보다 안전하고 저렴하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에게는 부실 금융기관을 문 닫게 하고 대주주나 채권단의 책임을 묻는 것보다는 은행의 부실이 금융권 전체로 도미노처럼 확산되는 것을 막는 게 더 중요했다.

한때 우리나라 최대 수출품이었던 조선 산업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지금, 우리 당국은 과연 어떤 원칙에 따라 산업 구조조정에 착수하는지 의문이다. STX조선·대우조선해양 등 주인 없는 기업의 대주주이자 주 채권 은행인 산업은행의 총재들이 산업 전문가이기는커녕 대대로 권력과의 친소관계에 의해 임명되는 상황에서 과연 가이트너처럼 자신만의 원칙을 고수할 수 있을까? 더 걱정스러운 것은 정치권의 행태다. 여야 의원들이 대거 조선소로 몰려가 '노조의 경영감시권 부여' '구조조정 최소화' 같은 개념 없는 약속을 해 댄다. 아무래도 한국 조선산업의 암담한 미래를 예견하는 전조(前兆)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