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고문

4·13 총선 이후 국정(國政)의 운영은 혼돈에 빠져 있다. 여야는 뒤바뀐 정치적 처지에 아직 적응이 덜 된 상태이고 청와대는 청와대대로 참패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어디서는 탈당·분당 얘기가 나오고, 어디서는 '새판'을 짜자는 소리도 들린다. 총선의 앙금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고 그래서 국민은 '주인 없는 정국'에 불안해하고 있다.

국정을 운영하는 책임은 대통령과 집권당에 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에게 현실에 대처하는 변신을 기대하는 것은 난망이라는 것을 거듭 깨닫고 있다. 박 대통령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성(城) 안에서 바깥세상을 질책할 뿐, 세상이 자기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자신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비호감을 가진 세력이 야대(野大)를 형성하고 있다는 현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청와대에서 국민을 안심시키는 국정이 나올 수 없다.

새누리당은 반신불수다. 그 주제에 친박-비박끼리 머리 터지게 싸우기까지 한다. 세상 변한 것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전통적 지지 세력인 보수-우파층이 자기들의 '한때 잘못'으로 자기들에게 회초리를 든 것일 뿐, 결국은 그들에게 되돌아올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참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새누리당은 이제 제2당 또는 야당으로라도 살아남아 있는 것에 자족하고 감지덕지하는 패배주의 집단으로 전락했다. 한국의 보수당이 위험에 처한 것을 인식하고 일대 혁신을 이끌 지도자도 없다. 아무래도 새누리당은 다음 대선에서 집권을 유지하기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새누리당에 국정 운영의 책무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다.

그렇다면 20대 국회의 정국에서 국정 운영은 누가 이끌 것인가? 청와대도 새누리도 아니라면 야당밖에 없다. 국회의원 선거가 지역 대표를 뽑는 것이지 국정 주체를 정(定)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현 국정 운영 체제에 불만과 이견을 표시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온당하다. 국민은 야당 또는 야권이 국정 운영에 대해 전반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어떤 책임'을 질 것을 이번 총선을 통해 주문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야당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보면 그런 인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집권 측을 희롱이나 하고 말장난하는 것을 즐기는 선에 머물고 있다. 합창이냐 제창이냐를 가지고 대통령을 물고 들어가는가 하면 '상시 청문회' 문제로 자기들의 세(勢)를 과시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국정이 혼선을 빚고 있는 것에 대해 걱정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국민에 대한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이제 어떤 형태로든 '집권 연습'을 해보여야 한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저렇게 침체해 있을 때 야당이라도 국정 파트너로서 위상을 견지해 국정의 혼선을 막아야 한다는 책임 의식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정권을 담당할 능력을 시험받는 길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경제는 어려운 국면에 처해있다. 주력 산업이 흔들리고 청년 실업은 가중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성장은 여기서 멈추고 있다. 국제 정세도 심상치 않다. 미국의 대선 결과는 우리에게 중차대한 의미가 있다. 북한의 움직임은 매 순간 우리 안보를 좌지우지한다. 이런 때 대통령과 여당이 선거 패배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야당이라도 나서서 국정의 구원투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야권은 야대(野大)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국민에게 '우리에게 맡겨도 잘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현 정부를 도울 것은 돕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는 대승적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 좌파 포퓰리즘에 편승해 안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계속 현 정권의 발목이나 잡고 여당이나 희롱하며 승리의 작취미성에 빠져 있다면 다음 대통령 선거의 승리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실 따지고 보면 4·13의 승리는 자신들이 잘해서 이긴 것이라기보다 새누리당 분열과 실책의 반사이익으로 몇 석(席) 더 얻은 것 아닌가?

20대 국회의 여야 구도는 그것이 현 상태대로 계속 유지된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많은 어려움과 문제점을 안겨줄 것이다. 1년 반이나 남은 박근혜 정부를 식물 정권으로 만들 수 있고 내년에 태어날 다음 대통령의 정부를 2년 반이나 붙들고 있을 수 있다. 새 대통령이 야권에서 나온다 해도 야권 연립 형태에 따라서는 많은 불협화음을 초래할 것이고 새누리당에서 나온다면 또다시 불행한 엇박자는 계속될 것이다. 내년 대선에서 명실상부한 정권 교체를 이루기 원한다면 야권은 반대 일변도의 습관적 야당 체질을 벗고 책임 있는 국정 운영에 협조하는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