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영화 '머니 몬스터'(감독 조디 포스터)가 칸 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에서 공식 상영되기 직전, 주연배우 줄리아 로버츠는 검정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 앞에 섰다. 계단을 오르는 순간, 드레스 자락 사이로 맨발이 보였다. 로버츠는 자신의 패션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 영화제 주최 측에서 하이힐을 신지 않은 여성의 레드카펫 입장을 막은 데 대한 무언의 항의인 것이 분명했다.

여배우의 맨발은 올해 칸 영화제에 불 여풍(女風)의 시작이었다. 다른 해보다 여성 감독의 작품 수가 늘었고, 스크린에서도 여배우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극장 밖에서는 여성 영화인들이 모여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3년만에 여성 감독 황금종려상 받을까

올해 공식 경쟁 부문에는 여성 감독의 영화가 세 편 있다. 지금까지는 아예 없거나 많아봤자 두 편이었다. 칸 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에 오른 스물한 편 중 열 편이 18일까지 공개됐다. 영화제 공식 소식지인 스크린 인터내셔널 데일리(이하 스크린 데일리)는 "절반이 공개된 이 시점에서 가장 흥미로운 영화 두 편 '토니 에르트만', '아메리칸 허니'는 모두 여성 감독 작품"이라고 했다. 나머지 한 편은 니콜 가르시아 감독의 '프롬 더 랜드 오브 더 문'이다. 세 작품 모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영화‘토니 에르트만’의 주연 산드라 휠러(왼쪽)와 마렌 아데 감독.

[[키워드 정보] 세계 3대 영화제중 하나인 칸 영화제란?]

마렌 아데 감독이 연출한 '토니 에르트만'은 세계 유력 매체의 평점을 모아 발표하는 스크린 데일리 평점에서 4점 만점에 3.8점을 받았다. 현재까지 최고 점수다. 고학력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네스와 그를 찾아온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네스는 회사에서 인정받기 위해 사생활을 버리고 일하는 독신 여성이다. 아버지는 그런 딸에게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토니 에르트만'이란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분장하고 나타난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앞좌석을 발로 차거나 바닥에 발을 구르면서 웃어젖히다 뒤통수라도 한대 맞은 것처럼 눈물을 줄줄 흘린다. 이 작품이 황금종려상을 받는다면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 이후 23년 만에 여성 감독의 수상이다.

◇여성 감독? 아직도 부족하다

안드레아 아널드 감독의 '아메리칸 허니'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잡지 방문 판매를 하는 빈민가 출신 10대 소녀의 성장담을 다루고 있다. 유색인종인 데다 가난하기까지 한 그는 사회에서 가장 약자일 수밖에 없다. 그의 눈으로 바라보는 미국의 빈부격차와 청년들의 하위문화를 감각적인 영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시대극인 '프롬 더 랜드 오브 더 문'에서는 마리옹 코티아르가 자신의 사랑을 찾아가는 자유롭고 열정적인 여성을 연기했다. 두 편의 시대와 장소, 주제는 판이하지만, 모두 여성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여성 감독뿐만 아니라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이 올해 유독 많다. '아가씨'(감독 박찬욱) '아쿠아리우스'(클레버 멘도카 필로) '줄리에타'(페드로 알모도바르) '퍼스널 쇼퍼'(올리비에 아사야스) '언노운 걸'(장 피에르·뤽 다르덴 형제) '네온 데몬'(니콜라스 윈딩 레픈) '엘르'(폴 버호벤) 등 모두 여자배우가 주연, 남자배우가 조연으로 출연하는 영화다. 지금까지 공개된 '아쿠아리우스'나 '줄리에타' '퍼스널 쇼퍼'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연령대 여성의 표정을 포착해냈다. 1930년대 한국과 일본을 배경으로 한 '아가씨' 같은 경우 LA타임스에는 '훌륭한 페미니즘 영화'라고 할 정도로 김민희와 김태리가 연기한 여성 캐릭터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칸 허니'의 안드레아 아널드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세 여성 영화감독이 여기에 오게 된 것은 대단하지만, 여전히 여성이 만드는 영화가 부족하다"고 했다. 스물한 편 중 세 편은 15%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