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유신 단행 5일 전인 1972년 10월 12일 오후, 서울시청에 나이트클럽· 카바레 '사장님'들 60여 명이 불려왔다. 양택식 시장은 "오늘부터 시내 전 유흥업소에서 고고음악 연주와 고고춤 추는 행위를 금한다"고 '지시'했다. 시는 이런 내용의 공한(公翰)도 전 업소에 발송했다. 금지 이유는 '선정적 음악으로 퇴폐적 풍조를 조성케 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국은 업주들에게 '불응하면 영업 정지'라는 으름장도 놓았다. 공권력이 특정한 음악과 춤을 적시해 전면 금지한 것은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조선일보 1972년 10월 13일 자) 1970년 말 조선호텔 고고클럽 등장 이후 불붙고 있던 고고클럽 붐은 철퇴를 맞고 얼어붙었다.

초창기 고고클럽의 풍경을 담은 신문 사진.(조선일보 1971년 3월 14일 자) 오른쪽 사진은 서울시가 전 유흥업소에 내린 ‘고고춤 금지령’을 대서특필한 기사.(조선일보 1972년 10월 13일 자)

1965년경 상륙한 고고춤은 삽시간에 청년들을 사로잡았지만, '퇴폐풍조'라는 사회적 비난을 바가지로 뒤집어썼다. 이 춤은 정해진 스텝이 따로 없어 촌스럽기 짝없는 막춤에 가까운데도, 기성세대와 언론은 고고춤과 고고클럽을 난타했다. 어떤 춤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컴컴한 실내에서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몸을 흔든다는 것 자체가 거부감을 준 것이다. 신문엔 고고 클럽에 관한 최악의 표현들이 난무했다. '환각 조명 속 지옥 같은 풍경'에서 '여자로 착각되는 긴 머리털'의 '미친 사람들'이 '춤을 춘다기보다 광란한다'고 묘사했다. 당시 고고클럽 현장 취재 기사에서 고고장 웨이트리스는 '남자손님들 대부분은 부유한 가정의 빗나간 대학생이거나 재수생과 젊은 회사원, 삼류 연예인 등'이며 여자는 '별로 질이 좋지 않은 층이 많다'고 말했다. 기사는 '춤추다 땀으로 젖은 손님들은 싸움터에서 돌아온 부상병 같다'고 표현했다. 처녀들이 고고클럽에 갔더니 웨이터가 '좋은 자리가 있다'며 남자들과 합석시켜 주는 풍경을 묘사하며 '이처럼 남녀가 만나는 것은 웨이터가 중개인'이라는 대목도 보인다. 이른바 나이트클럽의 '부킹(즉석 만남)'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신문의 논설은 "최신 인플루엔자 같은 것이 한국의 젊은이를 병들게 하고 있다" "이러한 반사회적 유흥이 왜 묵인돼야 하는가"라고 꾸짖었다. 비판여론을 업고 당국은 공권력을 총동원해 고고춤을 싹쓸이하려 했다. 1972년 고고 금지령 다음 날 당국은 전 유흥업소 일제 단속을 벌여, 무려 12만1000명을 단속하고 '퇴폐업소' 233곳을 행정처분 했다. 1973년 10월엔 다방을 전세 내 고고춤을 추며 동창회를 하던 대학생 84명 전원을 경찰이 연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고 열풍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서울의 고고클럽을 단속했더니 고고족들이 인천 등으로 지방원정을 가는 '풍선효과'도 나타났다. 심야영업을 금하자 클럽들은 셔터를 내리고 몰래 철야영업했다. 결국 고고춤 유행은 제 수명을 다하고 1978년쯤부터 디스코와 바통 터치했다.

오늘 대한민국의 밤문화는 그때 그 공권력의 서슬퍼런 댄스 금지령이 무색할 정도가 됐다. 지난 1월 3당대표와 관계 장관들이 참석한 '중·장기 경제 어젠다 추진 전략회의'에선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해 강남의 나이트클럽을 관광명소로 육성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논의도 있었다. 지난 어버이날 서울 어느 구청의 사회복지관이 개최한 '어르신 효 축제'에서 노인 600여 명이 열광적으로 춤을 춘 곳은 다름 아닌 나이트클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