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혁 논설위원

작년 초가을 무렵 친박계 핵심 인사를 만난 기억이 요즘 들어 새삼스럽다. '박근혜 대통령의 퇴임 이후'가 화제였다. 그는 "박 대통령은 과거 다른 대통령과는 다를 것"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철저하게 주변 관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권력형 비리로 인한 갑작스러운 레임덕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철벽같은 고정 지지층이 있어서 퇴임하고도 그 영향력은 유지될 것이란 얘기였다. 그는 '유승민의 반란'을 "TK(대구·경북)에서 '포스트 박근혜'를 노린 것"이라 평가하면서 "명백한 오판"이라고도 했다. 얼마 뒤 현직 장관과 전·현직 청와대 비서관들이 우르르 총선 출마를 선언하고 나왔다.

그 후 청와대 고위 관계자와 만나 앞서 친박 인사가 설파했던 '박 대통령 퇴임 이후 전망'이 생각나서 그 얘기를 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 관계자는 "친박이란 사람들이 '권력은 유한하다'는 이치를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했다. 그는 임기 말로 가면서 권력이 빠져나가는 기울기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퇴임 후까지 박 대통령을 '예외'로 두는 건 친박의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노태우 정부 청와대에서 5년간 근무하면서 한 정권의 처음과 끝을 지켜봤던 인물이다.

그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지금, 박 대통령의 '퇴임 이후'를 장밋빛으로 전망했던 친박 핵심 인사는 4·13 총선 참패 책임론에 휩싸여 '죄인'처럼 지내고 있다. 그와 다른 얘기를 했던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병기 전 비서실장인데 엊그제 청와대를 떠났다. 여권을 초토화한 지난 총선의 충격파는 이쪽저쪽을 가리지 않았던 셈이다.

'선거의 여왕'이라 불렸던 박 대통령 주변에는 오래된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선거나 장기적 정국 운영에 관한 한 결국은 박 대통령 판단이 옳았다'는 게 그것이다. 박 대통령은 작년 하반기 이후 총선 직전까지 국정 파행의 책임을 야당에 돌리는 '국회 심판론'을 줄기차게 제기했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참모들이 생겨났지만 누구도 감히 토를 달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무(無)오류'라는 전제를 깰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는 여당이 제1당을 내주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기록적 패배로 이어졌다.

여당 참패의 핵심 원인은 자기 지지층의 이탈이었다. 특히, 박 대통령에 대한 실망이 컸다는 분석이 많다. '진박(眞朴) 논란'과 '진흙탕 공천 싸움'이 '퇴임 이후'를 대비한 박 대통령의 자기 사람 심기, 권력의 고지(高地)에서 내려오는 것에 대한 거부로 비쳤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친박들은 그 방향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박 대통령을 아껴왔던 TK에서도 많은 사람이 거기엔 동의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박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걱정하는 사람이 늘었다. 대통령 힘이 너무 빠져 구조개혁과 같은 국가 과제들이 함께 떠내려가 버리지 않을까 우려한다. 그나마 박 대통령이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나에겐 이번이 마지막이다. 정말로 아무런 사심(私心)이 없으니 도와달라'는 진심을 담아 행동으로 보여주고 국민의 마음을 움직여나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어 보인다. 대통령은 여당에도 손을 떼고 친박도 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