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 이코노미조선 에디터

34년 전인 1982년 9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베이징에서 덩샤오핑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과 회담할 예정이었다.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후 운영 방식이 의제였다. 결론에 따라 영국이 얻는 이익이 달랐기 때문에 일정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썼다.

일정에는 인민대회당 답례 만찬도 포함돼 있었다. 대처 총리는 방중에 앞서 메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했다. 하나는 1인당 50위안짜리, 다른 메뉴는 75위안짜리였다. 요즘 환율로 치면 각각 9000원과 1만3400원짜리 식사이지만 34년 전 가치는 훨씬 높았을 것이다. 외무장관은 50위안짜리 식사를 선택하라고 권했다. 총리는 수용했다. 비싼 식단으로 중국인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예산 절감을 위해 의료비 지원을 삭감하는 정부가 외교 만찬에는 국민 세금을 낭비하느냐는 비판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스코틀랜드 훈제 연어를 추가하고 메뉴 중 딸기잼과 버터를 바른 빵을 과일 샐러드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대처 총리 일화가 생각난 것은 불황 속에 정부의 세금 수입이 호황을 누린다는 소식 때문이다. 기획재정부 통계를 보면 올 들어 3개월간 국세 수입은 64조원으로 1년 전보다 13조8000억원이나 늘었다. 작년에 담뱃값 인상이 공신 역할을 해 정부의 세입·세출 수지가 2조8000억원 흑자를 내더니 올해도 그 기조가 이어진다. 경기 침체와 산업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는 줄고 국민의 삶은 팍팍한데 정부 호주머니는 불룩해지고 있는 셈이다.

세금은 병역과 함께 국가 통치의 양대 수단이다. 불가피하지만 동시에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이다. 경제 전문가들이 꼽는 가장 좋은 세금 정책은 호경기 덕택에 세수가 증가하면서도 국민 세금 부담은 소득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호경기가 아니라 글로벌 불황이다. 미국·중국·일본·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은 경기 부양을 위해 적극적으로 돈을 풀고 있다.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정부는 재정 투입을 늘리고, 세무 당국은 이를 뒷받침할 실탄(세금 징수)을 마련하기 위해 바다 밑바닥까지 싹쓸이하는 '쌍끌이 저인망 어선' 전략을 쓴다.

경기를 살리려는 정부 노력은 응원할 일이다. 다만 파생물인 세수 호황은 민심을 자극한다. 더구나 여소야대 정국이 되면서 통제가 느슨해진 지방 공무원들의 예산 낭비는 쌍끌이당한 납세자들의 실망과 분노 대상이 된다. 내년 대선이 다가오면 정치권은 포퓰리즘 공약을 쏟아낼 것이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돈은 쓰되 낭비는 막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다. 불황기 국가 지도자의 딜레마이다.

국가·국민을 위해 할 일이 태산이라고 생각하는 국가 지도자가 세금을 아끼기란 말만큼 쉽지 않다. 대처 총리도 그랬다. 그가 값싼 메뉴를 선택하자 중국 주재 영국 대사가 외교 전문을 보내왔다. "50위안짜리 메뉴에는 중국 식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어 지느러미와 해삼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런 예산 제약하에서는 중국인들이 잊지 못하게 할 만찬은 불가능합니다." 대처 총리는 좀 더 큰 국익을 위해 대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예산을 절약하진 못했지만 그의 행동은 정권 후반기 한국 경제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