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희 국제부 기자

최근 큰 화제가 됐던 국제 뉴스 가운데 하나는 백악관 출입기자단 만찬에서 빛을 발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유머였다. 워싱턴포스트가 대통령의 직책인 '군(軍) 최고 통수권자(commander-in-chief)'에 빗대 "코미디계 최고 책임자(comedian-in-chief)"라고 칭찬한 오바마는 여야 정치인에게 뼈 있는 농담을 던지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을 희화화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백악관 기자단 만찬회는 1920년부터 백악관이 주최하고 있는 연례행사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국정 현안에 대한 농담을 선보여야 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다. 대통령 연설문 작가 데이비드 리트는 최근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이번 만찬을 위해) 나를 포함한 작가들은 몇 주 동안 농담 아이디어 수백 건을 오바마 대통령에게 제출했고, 심사를 통해 최고 후보작 35~40건을 골랐다"고 밝혔다.

이쯤 되면 유머를 추구하려는 서양 정치인의 노력이 우리에겐 '집착'에 가깝게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유머는 한국 정치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절대 아니라고) 우기기, (나는 몸통이 아닌 깃털이라고) 변명하기, (너 역시 피차일반 아니냐고) 상대방 흠집 내기' 3종 세트보다 상대방 주장을 무력화하는 데 훨씬 강한 효력을 발휘하곤 한다.

링컨 대통령은 정적(政敵) 스티븐 더글러스가 의회에서 자신을 "두 얼굴을 가진 인물"이라고 비난하자, 상대를 공격하는 대신 이렇게 응수했다. "여러분에게 얼굴이 둘 있다면 지금 저 같은 얼굴을 쓰시겠습니까?"

재치로 따지자면 영국의 처칠 총리 역시 뒤지지 않았다. 하원 의원 후보로 출마해 처음 합동 연설을 할 때 상대 후보가 자신을 "늦잠꾸러기"라고 공격하며 "저렇게 게으른 사람을 의회에 보내서야 되겠습니까?"하자 처칠은 "저 후보도 저처럼 예쁜 아내와 산다면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없을 겁니다" 하고 받아넘겼다. 상대방의 비난을 감싸 안을 수 있는 포용력과 여유 없이는 갖추기 어려운 내공이다.

"(야당인) 공화당은 늘 소수민족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눈앞에 있는 소수민족(오바마)부터 도울 것이지" 같은 자기 비하 계열 유머까지 종종 구사하는 오바마도 이런 자질을 갖춘 정치인으로 꼽힌다. 덕택에 임기 말년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한 상황에서도 이란 핵 합의, 쿠바 국교 정상화 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최근 CNN 조사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 지지율은 2012년 대선 이래 최대치인 51%를 기록하며 역대 미국 대통령 중 드물게 레임덕(임기 말 권력 누수 현상)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종종 소통을 위해 권위를 내려놨지만, 그 결과 오히려 대통령의 권위는 강해졌다.

딱딱하고 살벌한 한국 정치에서도 포용력에서 우러난 유머를 구사하는 정치인들을 볼 날이 올까. 백악관 만찬과 비슷한 시점에 국내에서도 대통령과 언론사 국장단의 간담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농담이 오갔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