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 대형 마트의 생활용품 판매 코너. 방향제를 구매하러 지난 9일 이곳을 찾은 주부 김모(36)씨는 "최근 가습기 살균제 사건 때문에 걱정스러워 제품 성분을 보고 있다"며 라벨에 적힌 내용을 꼼꼼히 살폈다. 옆에 선 마트 판매원이 "화학물질이 거의 들어 있지 않은 친환경 제품"이라고 말했지만 김씨는 "어떤 물질이 쓰였는지 정보가 전혀 없다"며 결국 구매를 포기했다.

지난 9일 서울의 한 대형 마트에서 한 여성이 세정제 코너에서 제품 라벨을 살펴보고 있다. 한 생활용품의 라벨(왼쪽 아래 사진)에 성분명이 제품 종류와 같은‘방충제’라고만 표기돼 있다.

실제로 '방향제·방충제'로 팔리는 이 제품의 라벨엔 '성분: 방충제, 향료, 산화방지제'라고 적혀 있었다. 방충제에 어떤 화학물질이 들었는지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고, 성분명을 제품 종류와 같은 '방충제'라고만 표기한 것이다. 세정제로 팔리는 다른 제품에도 성분명에 '비누, 살균제'로 기재돼 이 제품에 어떤 살균 성분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세 살 된 아들을 키운다"는 고모(32)씨는 "이런 식으로 표기하는 건 동어반복식 말장난"이라며 "(소비자를) 우롱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깜깜이' 성분 표시에 불안한 소비자

가습기 살균제에 사용된 유독 물질이 방향제·탈취제 등에도 포함돼 유통돼 온 사실이 정부 조사로 확인〈본지 5월 4일자 A16면〉돼 소비자들의 불안이 커지는 가운데 작년 말부터 시행된 '생활용품 성분 표시 제도'조차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본지 취재 결과 드러났다.

[[기관 정보] 환경부 "상당수 제조사 규정 위반"]

정부는 작년 6월 생활용품 가운데 건강이나 환경에 위해를 줄 우려가 있는 15종 제품〈〉을 선정해 이 가운데 방충제를 비롯한 7종은 작년 12월 26일부터 유해 화학물질이 제품 성분으로 쓰였을 경우 제품 겉면 라벨에 성분 이름과 '독성 있음' 표기를 의무화한 '표시 의무제'를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환경부가 생활용품 제조사들이 이 같은 표시 기준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 여부를 조사한 결과 상당수 제조사가 이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 소식통은 "올해 1월부터 실시한 실태 조사에서 표시 대상으로 지정된 화학물질을 썼으면서도 제품 라벨에 이를 표기하지 않은 제조사의 사례가 다수 적발됐다"면서 "제조사들을 상대로 경위 조사를 실시한 뒤 법에 따라 처벌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기자가 서울 시내 3곳 대형 마트와 수퍼마켓에서 100여개 생활용품의 라벨을 살펴본 결과 '독성 있음' 경고 문구가 적힌 건 나프탈렌 성분이 든 좀약 방충제가 유일했다.

유럽연합(EU)에선 살균·항균 기능을 하는 777종의 화학물질 가운데 하나라도 제품 성분으로 사용했을 경우 제품 라벨에 세부 성분과 함량 등을 모두 표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반면 국내에서는 제품 성분으로 사용할 때 함량을 일정 수준으로 제한한 것은 112종, '사용 제한 물질'은 155종이 있지만, 이 중 1,4-다이옥세인 등 35종만 표시 대상 화학물질로 지정된 상태다.

재고 처리 이유로 규제 1년 유예

이처럼 생활용품 표시 제도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것은 환경부도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작년 6월 환경부는 방충제 등 7종 생활용품에 대해선 6개월간 시행 유예 기간을 부여해 작년 12월부터 시행했고, 방향제 등 8종에 대해선 1년 3개월 유예해 오는 10월부터 표시 제도를 시행할 예정이다. 이 때문에 유독 물질이 든 방향제·탈취제 같은 생활용품이 시중에 지금도 유통되는 것은 물론 이 유독 물질이 제품 성분으로 쓰였다는 사실조차 소비자들은 모르는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유예 기간을 둔 것은 제조사들의 재고 처리 등을 염두에 두고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