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중퇴, 영어 엉망, 경제 지식 형편없고, 끊임없는 스캔들, 숨겨둔 자식, 불면증에 알코올중독….' 1998년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된 영화배우 출신 정치인 에스트라다에 대한 언론 평(評)이다. 그는 '의적(義賊)'을 자주 연기한 덕분에 빈민층 인기가 높았다. 취임 몇 달 뒤 말라카낭 대통령궁에서 인터뷰한 그는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다들 골칫거리만 들고 오니 대통령 하기 힘들어 죽겠다"고 했다. 그는 몇 년 뒤 뇌물 추문과 축재(蓄財)로 사퇴했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에스트라다는 대통령궁에서 쫓겨났지만 정치를 떠나지는 않았다. 사면받아 마닐라시장으로 재기했고 아들도 아버지에 이어 산후안시장이다. 필리핀 정치는 늘 익숙한 이름이 등장하는 그들만의 세상이다. 누구 아들, 누구 딸 식으로 몇 안 되는 가문으로 귀결된다. 아로요 대통령은 1960년대 마가파갈 대통령의 딸이다. 독재자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는 하원 의원이다. 아들도 상원 의원으로 이번 선거에서 부통령에 도전했고 딸은 주지사다.

[필리핀은 어떤 나라?]

▶필리핀 부(富)의 80%를 암파투안·아키노·마르코스·로하스 같은 15대 가문이 거머쥐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정부 요직도 대부분 이 집안들이 장악하고 있다. 상위 부자 10%가 정치 권력을 만들어내고 그 정치인들이 다시 자기네 부를 지킨다. 그 '가문 정치'를 깨뜨리는 이변이 일어났다. '필리핀의 트럼프'라는 검사 출신 시장 두테르테가 대선에서 승리했다. 명문가 출신도 아니고 얼마 전까지는 유력 후보도 아니었다.

▶그는 치안 불안에 시달리는 국민에게 "6개월 내 범죄 근절"이라는 단순하고 강력한 공약을 내걸었다. 시장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 범죄를 크게 줄인 실적도 신뢰를 줬다. 그러나 유세 중에 한 발언들은 '막말 제왕' 트럼프도 울고 갈 지경이다. "범죄자 시체를 빨랫줄에 널어 버리겠다" "(성폭행당하고 살해된 여성을) 내가 먼저 했어야 하는데" "장애인들은 자살하는 걸 고려해 보라" "범인을 내가 총으로 쏴 죽였다…."

▶필리핀 국민은 그간 '피플 파워'로 끊임없이 민주적 정권 교체를 해 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 봐야 유력 가문들의 자리바꿈에 불과한 현실에 좌절한 끝에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막말 정치'가 '가문 정치'의 건강한 대안(代案)일 순 없다. 미국인은 차별적·폭력적 발언을 삼가며 자기 관리를 중시한다. 그런 미국에서조차 트럼프가 승승장구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미국도, 필리핀도 위선적이고 무능한 정치에 신물 난 유권자들의 인내가 한계에 이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