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 문화부 차장

[총선 후 박 대통령·여야 첫 만남, 또 쇼인가 아닌가]

몇해 전 인터뷰한 김미경 서울대 교수는 강물처럼 고요하고 뚝심 있는 여자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처럼 성정도 담백했다. 나 같은 '아줌마'와 달리 남편 흉 예사로 보지 않는 게 인상 깊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남편을 존경했다. 남편이 의사의 길 버리고 생리학을 선택했을 때 "이 사람은 노벨상도 받을 수 있겠구나" 확신했고, IT 분야로 뛰어들어 V3를 개발했을 땐 "남들 알아주지 않는 길로 가 그걸 완성하는 모습에 나도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이 양적 완화가 뭔지 모를 것 같은데요? 경제를 모르는 사람이 청와대에 앉아 있어서"라고 말한 날 김 교수 얼굴이 떠올랐다. 남편의 발언은 남성 중심적인 의학계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그녀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을 것이다. 안 대표 말은 미국은 물론 한국 20~30대 여성들 사이 베스트셀러가 된 '맨스플레인'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man(남성)'과 'explain(설명하다)'의 합성어로 이 책의 한국판 제목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이다. 한마디로 '여자인 네가 뭘 알아? 오빠가 설명해줄게'다.

지난겨울 박 대통령이 유승민 의원 부친상에 조화를 보내지 않아 입도마에 올랐을 때 어느 여성 학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굳이 분류하자면 중도 좌파에 속할 이 교수는 "박 대통령 안 좋아하고 그래서 표도 안 줬지만 대통령을 향한 여성 혐오적 비난을 보면 부아가 치민다"고 했다. "남자들은 눈으로 쏘아보다 못해 주먹다짐까지 하면서 여자가 정색하고 쳐다보면 눈에서 레이저가 쏟아진다고 비아냥대요. 고집불통요? 노무현 대통령에 비할까요? 상가에 꽃 안 보냈다고 속 좁은 여자라 빈정거리는 건 또 뭡니까. 남자 대통령이 그랬어봐요. 그 심오한 정치적 의도가 뭘까 찾아내려 혈안이 되겠지."

박근혜 대통령은 요즘 만연한 여성 혐오의 정점에 있다. 권력자에다 여성이고 싱글이란 이유로 온갖 욕 다 먹는다. 야당 의원들은 걸핏하면 '결혼 안 해보고 애도 안 키워본 여자'가 제대로 정치 하겠느냐며 비하한다. 20대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하자 일베도 나섰다. "여자가 대통령 되니 나라 꼴 잘 돌아간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퍼붓는 이런 비난은 '천하의 악당×' '정치 매춘부'란 막말을 서슴지 않는 북한과 '본질적으로' 같다.

최고 권력에 대한 비난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처음엔 전지전능한 신(神)이라도 된 양 열광하다가 기대에 어긋나면 주저앉히고 싶어한다. 낮은 자세로 소통하라고 훈계하다가도 카리스마와 결단력이 없다고 힐난한다. 리더가 여성인 경우 그 강도는 갑절로 세진다. 비판은 하되 본류에서 벗어나지 않을 도리는 없을까. 미우나 고우나 우리 대통령인데, 그에 합당한 격(格)을 갖춰 대하면 비굴한 걸까.

옹졸한 피해의식? 맞다고 치자. 피해의식과 함께 투표권도 가진 여자들 눈 밖에 안 나려면 젠더 감수성(gender sensibility)부터 길러야 한다. 여자 대통령도 대통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