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스님·미황사 주지

산사의 오월은 푸르고 화려하다. 꽃이 피고 진 자리에 아이들 손가락처럼 예쁜 잎사귀들이 빼곡히 돋아난다. 부처님오신날이 가까워질수록 연꽃 등불이 짙푸른 봄 색과 어울려 또 다른 꽃으로 밝게 피어난다. 미황사는 시골 절이라서 아직 연등을 손으로 만든다. 전통 방식대로 일곱 색깔 한지를 붙여 만든 등에 촛불을 밝힌다. 바람에 촛불이 일렁이는 산사의 밤은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 낸다.

이런 등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 달 전부터 절 식구들과 인근 신도들, 아랫마을 작은 학교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틈을 내 모여든다. 함께 등 만드는 울력을 하며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은 참 따뜻하고 좋다. 나는 절집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공동체가 만들어져 사람들이 격 없이 얼굴 마주하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시골도 이제는 공동체의 흔적이 희미해지고 있다. 함께 기뻐해 주고, 슬퍼해 주던 결혼식이나 장례식도 읍내에서 치르고, 5일에 한 번 열리던 장도 시들하다. 아이들 울음소리도 그친 지 오래다. '신세 지기 싫다'며 홀로 사는 노인도 많아졌다.

시골에도 함께 사는 대전환의 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서로를 인정하는 속에서 스스로 치유의 힘이 생겨난다. 밥을 먹었는지 묻고, 살아 있음을 서로 확인하는 관계가 큰 힘이 된다. 또한 대중이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상대의 잘못을 통해 나의 허물을 보고, 다른 이의 훌륭함을 보고 따라 배우려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

나눌 추억이 있는 공간에서 새로운 추억을 만든다면 그것이 공동체 회복에 작은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어 절이라는 공간을 많은 이에게 개방하고 싶다. '어르신 노래자랑'과 '괘불재'를 만들어 사람들을 초대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이라는 공간에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이 직장의 입사 동료가 자신보다 먼저 승진했다는 발표를 듣고서는 화가 났다. 그 화를 다스리기 위해 명상센터를 찾아 숲길도 산책하고, 호흡도 고르고, 몸을 이완시키는 요가도 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나서 고요하고 편안해졌다. 명상의 시간이 끝나고, 맡겨둔 휴대폰을 받아드니 '지방에 발령이 났다'는 메시지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자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고 결국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직장에서 경쟁만 하려 하거나 대립하려고만 한다면 분명 직위의 높고 낮음, 일의 좋고 나쁨이라는 결과를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런 자세는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 데서 생긴 문제다. 공동체적 사고와 주인의 삶을 포기한 결과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49일이 지났을 때 깨달음의 지혜를 세상에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전법의 길로 떠나셨다. 그리하여 하루를 걸어서 녹야원에 도착했다. 과거에 함께 공부했던 도반들, 석가모니가 택한 수행법이 틀렸다며 떠나간 도반들을 찾아가 자신이 깨달은 법을 설했다. 4주 만에 다섯 명의 도반들이 모두 번뇌를 끊고 해탈을 이루자 "이제 우리는 깨달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모인 작은 수행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선언한다. 계급적 차별이 엄중하게 존재하던 사회에서 모두 평등하고 청정하며 행복한 공동체인 '승가'를 만들었던 것이다.

내가 스무 살에 만난 해인사는 전통을 잘 간직한 수행 공동체였다. 여름과 겨울 3개월씩 안거수행은 잘 지켜졌고, 보름에 한 번씩 큰스님으로부터 깨달음의 설법을 들을 수 있었다. 시시때때로 계율을 암송했으며 새벽 세시부터 시작해 저녁 아홉시까지 이어지는 수행의 법도는 엄격했다. 선의 스승, 경전의 스승, 계율의 스승들도 많았고, 그 스승을 찾아온 수행자들도 많았다. 2600년이 지난 시간에도 살아 있는 공동체 덕분에 그곳은 언제나 아름다운 수행 공동체였다. 나는 그런 덕화를 입은 사람으로서 그런 공동체를 꼭 한번 만들어보고 싶은 꿈이 있다.

지금 함께하는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삶을 함께하는 작지만 옹골찬 수행의 공동체를 만들어보자. 공동체는 수행을 돕고, 수행의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며, 마음이 쉬는 귀의처임을 잊지 말고 그 안에서 부지런히 정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