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어느 국립 연구기관장 딸의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은 답례품으로 인스턴트 라면 묶음을 받았다. 식사 따로, 답례품 따로 제공하는 오늘의 결혼식과 달리 라면이 '답례'의 전부였다. 피로연을 생략하고 간소한 답례품으로 대신하는 결혼 문화는 전후(戰後) 어려운 경제 사정 속에서 싹터 20년 가까이 이어졌다. 인기 1위의 답례품은 찹쌀떡이었다. 우리 전통 떡이 아니라 '앙꼬(팥소)'를 듬뿍 넣은 일본식 '모찌'였다. 부부 사이가 찰떡같기를 바라는 뜻이 담겼다. 1960~70년대에 서울 시내 유명 떡집 수십 곳은 답례품 전문 가게로 큰돈을 만졌다. 결혼식장 축의금 접수부에선 봉투 하나에 답례품 한 개씩 줬다. 먹을 게 넉넉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하나라도 더 얻어먹으려는 사람도 꽤 있었다. 떡이나 카스텔라를 많이 받으려고 온 가족이 동원돼 빈 편지 봉투 하나씩을 냈던, 웃지 못할 풍경도 빚어졌다. 이 정도야 애교로 봐줄 수 있지만, 답례품을 슬쩍하는 전문 절도범은 골칫거리였다. '케이크 부대'라고 불린 이들은 하객으로 가장해 여러 결혼식장을 돌며 비누, 수건, 찹쌀떡 등을 최대한 받아낸 뒤 시장에 팔아넘겼다. 1972년 봄엔 저명인사 결혼식장만 찾아다니며 값비싼 답례품을 훔쳐 팔아온 30~40대 남녀 16명이 무더기로 경찰에 붙잡혔다(조선일보 1972년 3월 10일 자).

하객들에게 증정할 답례품 박스들이 테이블 위에 쌓여 있던 1960년대 결혼식장의 풍경. 오른쪽 사진은 당시 가장 인기 있는 답례품이었던 찹쌀떡.

답례품 시대는 1969년 일단 막을 내린다. 정부는 '가정의례준칙'을 공포해 청첩장, 답례품, 피로연을 모두 금지했다. '10월 유신' 이듬해인 1973년엔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까지 만들어 더 강하게 규제했다. 청첩장, 답례품을 주다 걸리면 처벌했다. 한동안 결혼식 하객은 축의금 봉투만 내밀고 빈손으로 그냥 돌아가야 했다. 하객들 사이에선 "가는 정만 있고 오는 정은 없느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어떤 신랑은 미안했던지 돌아가는 하객들에게 멋쩍게 절을 하기도 했다.

결국 편법이 고개를 내밀었다. 상당수 결혼식에선 하객에게 일일이 귓속말로 "어디 어디 식당으로 오세요"라고 피로연을 알렸다. 청첩장 역시 '청첩'이란 말만 쏙 빼고 '알립니다' 혹은 '모시는 글' 등의 제목으로 결혼식 내용을 적어 보통 편지처럼 전하는 집이 늘어갔다. 당국도 1980년부터는 결혼식 하객에 대한 간단한 음식 접대는 묵인하기 시작한다. 대중음식점의 '갈비탕 피로연'이 이 무렵 보편화된다. 답례품은 여전히 규제했지만 단속을 피하려고 성냥갑 속에 천 원짜리 지폐를 넣어 '답례금'으로 주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법 따로 현실 따로'의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건 헌법재판소의 결정이었다. 헌재는 1998년 10월 피로연, 답례품 등의 금지가 국민의 행복추구권과 배치된다며 재판관 전원 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지난 반세기 동안 결혼식 답례품은 합법과 불법 사이를 오가며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오늘날에도 답례품이 있지만 식사 대접 대신 주는 물건은 아니다. 신랑·신부는 다양한 답례품으로 개성을 뽐낸다. 최근 결혼 답례품 인기 순위를 조사했더니 마카롱, 수제 쿠키, 더치커피 등 서구식 디저트들이 수위를 차지했다. 최고로 꼽혔던 떡은 순위에 들지도 못했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게 있다. 답례품 절도다. 지난달 30일 대구의 어느 결혼식장에서는 하객에게 줄 답례품 향초 100여 개가 도난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