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특파원으로 6년 가까이 근무했다. 그동안 방우영 상임고문은 여러 차례 도쿄를 방문했다. 하지만 그의 부름을 받은 건 주로 간다(神田)의 서점가에 갈 때였다. 방 고문은 "이 기회에 막 챙기라"며 자신이 볼 책과 함께 특파원이 볼 책까지 골랐다. 언론·정치·역사는 물론 철학·문학을 가리지 않았다. "기자는 글을 잘 써야 한다"며 일본어 작문 서적까지 뽑아준 적이 있다. 선배 특파원들도 다들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방 고문은 독서가였다. "(대학 때) 주먹질이나 하고 다니던 놈이라고 무시하기에 일본 책 삼천권을 냅다 읽었다우." 그의 독서량은 족히 수만권은 됐을 것이다. 방 고문이 조선일보에 상무로 입사했을 때 당대(當代)의 글쟁이들이 즐비했다. 그는 그들과 함께 민족과 국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혼자 다 고민했던 것처럼 포장하지 않았다. 그의 독서열(熱)은 연재·특집·인터뷰로 발전해 화제를 터뜨리는 분수 역할을 했다. 23년 동안 장장 6702회 이어진 '이규태 코너'도 그의 아이디어로 시작됐다.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고문은 누구?]

▶"무슨 싸움을 이렇게 시시하게 하나. 제대로 한방 갈기라우." 특정 정파(政派)나 재벌·단체가 신문에 시비를 걸어오면 월급쟁이 기자들은 움츠러든다. 방 고문은 그럴 때마다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옳은 것을 옳다고 쓰고, 잘못된 것은 끝까지 아니라고 써야 한다고 했다. 싸움이 귀찮거나 싫다고 물러서지 말라고 했다. 옳은 뜻을 굽히는 기자는 기자도 아니라고 했다.

▶방 고문은 뜨거운 기자를 좋아했다. "흥분할 줄 모르면 기자도 아니다." 출장 갈 때도 흥분해서 가야 하고, 조그만 부음 기사도 흥분해 써야 그 사람의 일생이 고스란히 지면에 담긴다고 했다. 취재할 때부터 흥분해야 기사가 팔짝팔짝 살아 움직이고 지면에 활기가 넘친다는 것이다. 신문 편집도 시원하고 탁 트인 디자인을 좋아했다. "무슨 지면이 이렇게 지저분해!"라고 할 때면 다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국 언론 수난과 발전의 산증인이었고 언론사에 기록될 많은 일화를 남겼다. 한 언론 경영인의 인생이 군부독재와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까지 모든 격동기를 거친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그도 한때 기자를 했지만 기자나 경영인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신문인'이라고 했다. 신문인이란 기자, 경영인 등 모든 것을 아우른 작명인지 모른다. 방 고문은 입버릇처럼 '구질구질하고 쩨쩨한 게 싫다"고 했다. 인생도 그렇게 살기 싫다고 했다. 그러더니 88세 미수(米壽)에 인생을 마감했다. 신문기자로 사는 한 그가 오래 그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