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중궁궐 깊은 속을 달빛 아래 걷는 기분은 어떤 걸까? 창경궁(昌慶宮·사적 제123호) 야간 특별 관람이 인터넷 예약이 시작되기 무섭게 매진되고 있다. 2011년 시작해 올해로 6년째. 올 들어 두 번째 개방해 6월 2일까지 이어지는 봄날 야경 산책에 세 기자가 다녀왔다.

창경궁은 서울 도심 궁궐 가운데 가장 저평가된 곳이다. 40~50대 이상은 창경궁 하면 창경원 시절 벚꽃놀이부터 떠올린다. 1909년 일제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참석한 가운데 동·식물원 개장식을 열었고, 1911년 그 이름이 창경궁에서 창경원으로 격하됐다. 광복 후에도 창경원은 서민들이 꽃 구경에 동물 구경까지 할 수 있는 최고의 나들이 장소였다. 곡절 많은 이 창경궁이 이제 서울 시민들의 밤 마실 코스로 새롭게 사랑받고 있다.

문화재 담당 허윤희 기자는 "정전(正殿)인 명정전 뜰 양쪽에 놓인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불빛이 궁궐의 품격을 살렸다"고 했다. 권승준 기자는 "명정전·문정전 같은 전각도 조명 덕분에 낮보다 훨씬 우아하게 보였다"고 했다. 칠순 시어머니와 아홉 살 딸과 동행한 김윤덕 기자는 달랐다. "너무 컴컴해서 당황했다. 눈 침침한 어머니 계단 헛디디고 도랑에 빠질까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낮에 왔으면 살랑살랑 즐기며 걸었을 꽃길이요, 숲길이었을 테다.

산책길엔 어린 시절 창경궁 추억을 도란거리는 사람들도 많다. 40대 중반 김 기자는 "여덟 아홉 살 땐가. 시골서 버스 타고 단체여행 왔는데 동물보다 사람이 훨씬 많아 엄마 손 놓칠까 가슴 졸인 기억이 난다"고 했다. 허윤희 기자는 "네 살 때 온 가족이 놀러 와서 찍은 사진이 있는데 뭘 구경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며 웃었다. 당시 창경원 벚꽃놀이는 떠들썩한 봄맞이 축제였다. '지난 일요일에는 13만이 몰려들었고… 밤 벚꽃놀이가 시작되면서부터 밤마다 8000~1만명이 몰렸다.(중략) 아프리카산 수사자가 우리를 찢을 듯이 울부짖고, 새로 등장한 아폴로 우주선이 빙빙 돈다.'(1970년 4월26일 자 조선일보) 결국 1983년 문화재관리국은 창경궁 복원 계획을 발표했다. 동물들은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벚나무는 여의도 윤중로와 서울대공원으로 대부분 옮겨 심었다.

토요일인 지난 30일 창경궁 야간 특별 관람을 온 젊은 관람객들이 셀카를 찍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관람료 1000원. 한복을 입고 오면 인터넷으로 예매하지 않아도 무료 입장할 수 있다.

한때 벚꽃 흐드러졌던 자리엔 잘 가꿔진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관람객을 맞았다. 이날은 유난히 젊은 관람객이 많았다. 셀카봉, 삼각대까지 촬영 도구로 무장한 이들이 수시로 눈에 띄었다. 창경궁은 1483년 성종이 왕실 어른들을 모시기 위해 창덕궁 옆 수강궁 터에 새로 지은 궁이다. 중궁전으로 쓰인 통명전은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운명적 대결이 펼쳐진 무대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흉물을 묻어 둔 곳이 통명전이다. 명정전 옆 문정전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참극의 현장이다. 안내 팻말엔 그저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어전 회의를 하던 곳'이라고만 적혀 있다. 김윤덕 기자는 "미리 공부하고 오지 않았다면 참담한 역사의 비감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칠 것 같다"고 했다. 허윤희 기자는 "낮에는 내부를 볼 수 있는 통명전, 집복헌 같은 전각들이 밤에는 폐쇄되는 게 아쉽다"며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사연을 품은 통명전 내부, 후궁 처소이자 사도세자와 순조가 태어난 집복헌 속살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고 했다.

야경의 하이라이트는 춘당지 연못이다. 물에 비친 능수버들에 절로 감탄이 인다. 연인들이 밀어(密語)를 나누기 딱 좋은 곳. 권승준 기자는 "호수 주위로 둘러쳐진 조명을 따라 한 바퀴 걸으면 여수 밤 바다가 부럽지 않다"고 극찬했다. 밤 8시부터 50분간 통명전 앞뜰에서 펼쳐지는 국악 연주회도 무한한 행복감을 안겨준다. 김 기자는 "화려한 조명이 색색으로 비추는 전각 마루에서 한복 곱게 입은 연주자들이 귀에 익은 우리 음악 들려주니 어머니와 딸아이 어깨에 흥이 절로 일었다"고 했다. 창경궁을 한 바퀴 돌아 나오는 길, 권승준 기자는 "더없이 매력적인 두 시간짜리 데이트 코스였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