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열 정치부장

선거 결과가 나왔다. 이만저만 진 게 아니다. 여권(與圈)이 전국 선거에서 이렇게 참패한 적은 없었다. 수도권은 물론 당의 근거지라던 지역까지 무너졌다. 이긴 야당 쪽도 믿어지지 않는지 "우리가 두려울 정도"라고 한다. 정권은 아직 1년 반 남았는데 정국 주도권은 야당에 넘어갔다. 당 지도부 퇴진은 당연한 일이지만 뒤를 메울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당내에선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전부터 "내가 늘 옳다는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쓴소리는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 친위(親衛) 세력의 위세 앞에서 제대로 목청을 높일 수가 없었다. 현재가 어려우면 미래라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역시 난망이다. 선거에서 대패(大敗)하니 그나마 10%를 조금 넘던 대선 주자들 지지율도 모두 한 자릿수로 쪼그라들었다. 반면에 야당엔 자원이 넘친다. 야당 대표를 지낸 이와 그의 경쟁자가 압도적 1~2위다. 여권이 기댈 언덕이라곤 관료 출신의 정치권 밖 인사밖에 없다. 그나마도 그가 과연 정치에 발을 들일지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세워야 할지 보이지가 않는다.

지금 얘기가 아니다. 10년 전 2006년 5·31 지방선거 직후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 모습이다. 대통령은 자신이 믿는 길만 소신 있게, 또는 고집스럽게 걸어왔다. 대통령 주변에 완장 찬 사람들은 "어느 쪽에 설 거냐. 누구 편이냐"는 선택을 강요했다. 그러다 혼쭐이 난 것이다.

그러면 2016년 새누리당은 앞으로도 2006년 열린우리당과 같은 길을 갈까. 암담해 보이긴 하겠지만 한국 정치에서 1년 반은 긴 시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 쪽에 기회는 있다. 2006년 당시 선거 직후 여론조사에서 야권의 박근혜·이명박·손학규 세 사람을 합한 지지율은 50%에 미치지 못했다. 절반 이상 국민은 '여당 하는 걸 지켜보겠다'는 태도였다. 누구도 노무현을 만든 세력이 허무하게 무너지리라 보지 않았다. 그 가능성을 망친 1차적 책임은 노 대통령에게 있었다. 선거 2주 뒤 "저항 없는 개혁은 없다"며 '마이 웨이'를 선언했다. 일신을 기대하며 나왔던 개각 요구에 대한 응답은 기존 참모들을 전진 재배치한 '역주행'이었다. 그러고는 "정치와 역사에 관해 원칙주의를 견지해 왔고 앞으로도 이 입장을 견지해 나가겠다. 적당하게 타협하지 않겠다"며 역대 대통령이 늘 했던 '역사와의 대화'를 시작했다.

이런 대통령 못지않게 당시 여권의 가능성을 망친 책임자들은 친노이다. "우리 정체성을 지키자"며 대통령 찬가(讚歌)를 계속했다. 좌장이니 뭐니 하던 중진들은 말로만 "책임 통감"을 외치고 뒤에선 이들에게 올라탔다. 민심 이반을 반성하고 새로운 출발을 도모하려는 다른 의원들에겐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새 지도부에서 "경기 부양 정책을 일부 수용하자"고 하면 "보수 세력에 굴복할 거냐"고 받아쳤고, 북한이 핵실험을 해도 대북·외교 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당시 여권은 결국 '친노당' '비노당' '제3 신당' 등으로 갈라지며 지리멸렬하다가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을 다 내줬다.

대통령은 여간해서 자기 길을 바꾸지 않는다. 평생의 소신과 지난 몇 년간의 국정 운영 상당 부분을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느니 '역사의 평가'를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대통령이 그런다고 '친(親)무슨' 세력까지 덩달아 "그래 맞아, 우리가 뭐 잘못했느냐"고 나서는 거다. 국민이 뭘 잘못했다고 하는지 몰라서 묻나. 국민들 보고 자기들이 만든 잣대에 "왜 맞추지 않느냐"고 했던 것만으로도 퇴장감이다. 등을 돌려 대통령 때리기에 나서라는 얘기가 아니지 않은가. 그냥 뒤로 물러서고, 다른 이들이 새 길을 찾으려 할 때 묵묵히 도와주면 된다. 반성을 요구하면 반성하고, 남 탓 '물귀신' 하지 말고, 2선 후퇴 요구받으면 좀 억울하더라도 빠져줘야 한다. 솔직히 친박이 친노처럼 10년간 '쑥과 마늘'만 먹으면서도 버텨낼 정도로 동지애와 투쟁 의식으로 뭉친 집단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친박은 4년 국회의원 임기도 새로 보장받았다. 또 10년 전 노무현 대통령 지지율은 10%대였지만 지금 박 대통령은 그래도 30%가 있다. 10년 전 친노와 다른 길을 갈 기회가 충분히 있다. 그래도 한 정권을 만들고 나라를 책임졌던 사람들이다. 그에 맞는 절도와 품격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모두 죽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