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원로들은 21일 "박근혜 대통령이 앞장서서 당내 친박(親朴)계 해체를 선언하라"고 주문했다. 전직 국회의장과 당 대표 등으로 구성된 새누리당 고문단은 이날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대표 권한대행을 맡고 있는 원유철 원내대표 초청으로 오찬을 함께했다. 이들은 4·13 총선 패배 원인으로 한결같이 공천 과정에서 불거진 계파 갈등을 들었다. 그러면서 "당 재건(再建)의 출발점은 계파 구분을 없애는 것에서 시작돼야 한다"며 "그러려면 박 대통령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고 했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이날 "모든 책임은 청와대로 가게 돼 있다"며 "대오각성과 새로운 변화도 결국 박 대통령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박 대통령이 먼저 친박 계파 해체를 선언해야 한다"고 했다. 이날 모임에 불참한 박관용 전 국회의장도 본지 통화에서 "대통령이 이제 친박, 비박을 떠나서 모두 다 같은 당원으로 상대하겠다는 의사 표현을 하는 게 급선무"라며 "대통령이 두 계파를 모두 불러 '나도 잘못했고 너도 잘못했지만 다 하나로 만들자'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전 의장은 "(6월 예정인) 전당대회 전에 계파 청산을 선언해야 한다"고 했다.

권철현 상임고문은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뭘 믿고 그랬겠느냐는 얘기가 많았다"며 "결국 박 대통령이 바뀌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고 했다.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본지 통화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새누리당에 '섭섭하다'고 화만 낼 게 아니라 같은 당 사람부터 자신의 생각을 지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며 "의원들은 이제 대통령 눈치보지 말고 자기 생각을 국민 앞에 내놓고 당당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날 모임의 참석자들은 "김수한 전 의장이 고문단 대표로 박 대통령을 면담해 오늘 나온 이야기들을 전달해야 한다"고 했다.

원로들 말 받아적는 원유철 - 원유철(맨 왼쪽)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21일 서울 여의도 한 중식당에서 열린 당 상임고문단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김수한 전 국회의장의 인사말을 메모하면서 듣고 있다.

[총선 후 새누리당의 행보는?]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누구?]

원로들은 이번 선거 패배에 책임이 있는 친박들의 2선 후퇴도 주장했다. 대표나 원내대표 경선 등에서 물러나 있으라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원로자문그룹 '7인회' 멤버인 김용갑 고문은 "진박 논란을 일으킨 친박들은 반성해야 한다"며 "자숙하지 못하고 다시 친박을 모아 뭘 하겠다 이렇게 나오면 국민이 실망할 것"이라고 했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우리가 이렇게 우왕좌왕한 적이 없었다"며 "문제는 속도"라고 했다. 그는 "지금 선거 끝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는데 (당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며 "빨리 비대위도 구성하고 원내대표도 뽑아서 패배의 아픔을 잊고 우리를 지지했던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줘야 한다"고 했다. 인명진 목사(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는 본지 통화에서 "새누리당의 가장 큰 문제는 자생력이 없다는 것"이라며 "앞으로 박 대통령은 당과 거리를 둬야 하고 당은 대통령에게 기대지 말고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이날 고문단 오찬 분위기는 비장했다고 한다. 김수한 전 의장은 모두 발언에서 "만년 표밭이라고 자만했던 서울 강남 벨트와 영남권에서 폭풍처럼 불어닥친 국민의 분노 앞에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며 "막중한 국가적 위기 앞에서 집권당이 실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원색적인 막장 드라마를 국민에게 보여줬다"고 했다. 이에 대해 원 원내대표는 "살생부, 막말, 옥새 파동 등 공천 과정의 추태 때문에 국민이 마음을 돌리고 무겁게 심판했다"며 "여러 고문님이 새누리당을 지켜주시고 대한민국을 이만큼 잘사는 나라로 만들어주셨는데 후배인 저희가 민심을 받들지 못했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이번 패배를 내년 대선 승리를 위한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유준상 고문은 "이번 선거는 여당의 참패이지만 국민의 승리"라며 "철저한 반성과 회개를 통해서 국민께 봉사하는 자세를 갖게 되면 국민이 다시 지지할 것이고, 이는 내년 대선을 위한 보약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한편 고문단 모임이 열린 식당에서는 같은 시각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측근 이군현 의원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러나 김 전 대표 일행은 방이 달라 고문단과 마주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