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341쪽, 가로 18.2㎝ 세로 25.7㎝, 무게 2.5㎏. 두껍고 무거운 이 책이 지난달 초 인터넷 서점 알라딘 예약 판매 개시 첫날에 1500부 팔렸다. 알라딘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출간 한 달여인 현재 판매 부수는 4000부. 유명 작가들도 초판 2000부를 소화하기 힘든 출판계 불황에 이례적인 일이다. 가격도 3만3000원으로 만만치 않다. 지난 2월 23일부터 3월 2일까지 9일간 진행된 야당의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속기록 전문(全文)을 엮은 책 '필리버스터: 민주주의, 역사, 인권, 자유'다.

홈페이지 공개된 속기록 판매

이 책의 콘텐츠는 새로울 것이 없다. 서문조차 없이 속기록만을 엮어냈다. 속기록은 국회사무처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어 굳이 책을 사지 않아도 누구나 무료로 열람 가능하다. 군데군데 필리버스터 보도 사진이 들어갔지만 7장에 불과하다.

이 책은 부부가 운영하는 신생 회사 '이김출판사'의 첫 책이다. 이송찬(32) 이김출판사 공동대표는 "TV에서 방영한 필리버스터 장면이 인상적이어서 속기록을 찾아봤다. 분량이 많아서 읽기 편하도록 책으로 엮어서 갖고 싶었다. 내가 갖고 싶으니 나와 비슷한 사람이 1000명 정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일단 1000부만 찍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고 했다.

국회 속기록은 공개적으로 행한 정치적 연설로 분류돼 저작권 허가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 가능하다. 공유 상태인 저작물을 판매하려다 보니 '대동강물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이라는 비난이 우려됐다. 이 대표는 "국회사무처 등의 조언을 거쳐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였다. '제본하는 데 그쳤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종이값이 많이 들기도 했지만 중앙선관위에 문의해 보니 필리버스터 속기록을 무료로 배포하거나 기존 책보다 싼값에 팔면 선거법에 저촉될 여지가 있다고 해서 가격이 높아진 측면도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는 "필리버스터 속기록은 특정 정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책"이라며 "그런 책이 일반 책들보다 싼값으로 판매되면 통상적 가격과 책 가격의 차액을 해당 정당에 기부한 것으로 돼 공직선거법 위반이 된다"고 설명했다.

20~30대 여성이 주로 샀다

구매자 분포도도 주목할 만하다. 책 판매량 4000부 중 2800부를 소화한 알라딘 집계 결과 구매자의 78.8%가 여성이다. 성별 및 연령 종합 분석 결과를 살펴보면 전체 구매자의 37.5%가 20대 여성으로 가장 높고 그다음이 30대 여성(30.9%)이다. 20대 남성은 5.9%, 30대 남성은 10.7%, 40대 남성은 3.1%다. 박태근 알라딘 인문·사회 담당 MD(상품기획자)는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책을 많이 사지만 정치·사회 분야는 다르다. 아무리 여성이 많이 산다 해도 남녀 구매자 비율이 5:5 정도인데 이 책은 예외적"이라고 말했다.

출판계 관계자들은 이 책이 '읽기 위한 책'이 아니라 '소장하기 위한 책'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소장용 책 구매는 책 내용에 동의한다는 자기 의사 표현에 가깝다는 것이다. 박태근 알라딘 MD는 "국회에서 의원들이 '날치기 싸움'이 아니라 법안을 두고 자기 주장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 젊은 층에게 좋은 인상을 줬다. 그에 대한 동의가 판매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도훈 예스24 인문사회·정치 MD는 "필리버스터라는 것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구매로 봐야 한다. 필리버스터가 한국 정치사의 의미 있는 기록이라고 믿은 사람들이 이 책을 샀다고 본다"고 했다.

여성 구매자 비율이 높은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된다. 한 출판인은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구매로 의사를 표현하는 데 익숙해서 여성 구매율이 높은 것 같다"고 했다. 20~30대 여성들이 많이 이용하는 사진 중심 SNS 인스타그램에 14일'#필리버스터'라는 검색어를 넣었더니 9500여개의 게시물 중 이 책을 구매했다는 '인증샷'이 상당수 눈에 띄었다. 구매자들은 "역사의 한순간에 있었다는 물질적인 증거를 손에 쥐고 있다" "본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샀다" 등의 소감을 남겨 정치적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정치는 나이 든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젊은 여성 독자층의 등장으로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