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식 부국장 겸 사회부장

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2년 전인 2004년 1월이었다. 당시 기자는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취재팀장이었고, 박 대통령은 재선(再選) 의원이었다. 그 무렵 박 대통령은 새누리당 소장파 의원들과 자주 모임을 가졌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제왕적 총재’ 1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전(前)근대적 정당에서 벗어나 ‘민주적 의사 결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외쳤다. 처음 만난 기자에게 30분 가까이 이 문제를 이야기했다.

박 대통령은 그해 3월 새누리당의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총선을 20여일 앞둔 시점이었다. 새누리당은 당시 두 번의 대선 패배와 불법 정치 자금 차떼기 의혹,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이후 불어닥친 역풍(逆風)으로 난파 직전의 위기를 맞았다. 새누리당 자체 여론조사에서 국회 의석 299석 중 50곳도 이기기 힘든 것으로 나왔다. 이 위기를 수습한 게 박 대통령이다. 그는 당대표 당선 직후 번듯한 건물에 자리 잡은 당사(黨舍)를 버리고 나와 여의도의 공터 한쪽에 천막 당사를 꾸렸다. 전국을 돌며 '한 번만 용서해달라' '살려 달라'고 호소했다. 당의 권력도 나눴고 각종 쇄신책을 내놨다. 고질병인 당내 계파 다툼도 사라졌다. 이런 절박함으로 새누리당은 121석을 얻었다. 국회 1당 자리를 내줬지만 노무현 대통령과 친노 세력의 독주를 견제하기에는 충분한 의석이었다.

그 후 10여년, 박 대통령은 지금의 야당과 겨룬 선거를 전부 이겼다. 그중 상당수가 새누리당이 이기기 힘든 선거들이었다. 4년 전 총선도 그랬다. 당시 새누리당은 총선을 5개월여 앞두고 당 내분과 전당대회 부정 경선 의혹 등으로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반면 지금의 야당은 흩어진 세력들을 다시 모아 통합 신당을 만들었고, 야권 후보 단일화도 성사시켰다. 박 대통령이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떠맡게 됐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 실시되는 총선은 누가 봐도 여당인 새누리당에 불리한 구도였다.

박 대통령은 당 지도부(비대위)에 새누리당 출신이 아닌 사람들을 대거 영입하는 뜻밖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경제 민주화'의 상징인 김종인 전 의원, 이상돈 전 교수, 20대 중반의 이준석씨, 새누리당의 차떼기 의혹을 수사했던 안대희 전 대법관 등이 새누리당에 들어왔다. 지금 더불어민주당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종인, 국민의당으로 둥지를 옮긴 그 이상돈씨가 4년 전에는 박 대통령과 손을 잡고 새누리당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대통령 취임 후 박 대통령이 보여준 인사(人事)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폭(幅)과 파격을 선보였던 것이다. 이 선거에서 새누리당은 국회 과반 의석 확보라는 예상을 뛰어넘는 승리를 거뒀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후 치러진 네 번의 국회의원 재·보선에서도 전승(全勝)을 기록했다. 재·보선은 유권자가 정권을 향해 매를 드는 선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보선에서 사실상 전패(全敗)했고, 박 대통령의 전임자인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네 번의 선거 중 딱 한 번 이겼을 뿐이다. 반면 박 대통령은 세월호 침몰과 두 번의 총리 후보자 낙마(落馬)라는 악재가 이어진 가운데 열린 2014년 7월의 재·보선에서까지 승리를 거뒀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이길 수 없는 선거'를 거듭 이기고, 거꾸로 야당은 '질 수 없는 선거'에서 계속 지는 일이 되풀이됐다.

이렇게 이어진 선거 승리가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독(毒)이 됐다. 절박함은 사라지고 당내 계파 다툼으로 제 발등 찍기에 바빴다. 사실 선거 구도만 놓고 따지면 어제 실시된 총선은 새누리당이 손쉽게 압승(壓勝)을 거두는 것이 정상이다. 야당이 선거를 앞두고 둘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야당 내 곁가지 세력이 떨어져 나가 딴살림을 차린 게 아니라 몸통에 가까운 세력들이 뛰쳐나갔다. 새누리당이 기록적 승리를 거둘 수 있는 호기였다. 여당이 더 이상 국회 선진화법에 발이 묶이지 않아도 되는 180석 이상을 얻는 게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이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찼다. 공천 과정에서 새누리당이 보여준 추태와 기행은 역대 최고 수준이다. '까불면 죽는다'는 선거의 철칙을 어긴 것이다. 결국 이번에는 여당이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 선거 불패(不敗) 신화를 써 왔던 '선거의 여왕' 박 대통령에게는 뼈아픈 패배다.

이번 총선 결과는 이 정권과 여당에 대한 분노가 미덥지 않은 야당을 향한 불만·불안을 압도한 것이다. 박 대통령이 거듭된 승리에 취해 잊고 있었던 성공 비법을 되살려 낼 수 있다면 이 패배는 약(藥)이 될 수 있다. 그러려면 12년 전 천막 당사 시절처럼 쇄신(刷新), 쇄신 또 쇄신하는 것밖에 달리 길이 없다. 박 대통령이 그간 위기의 순간마다 선보였던 극적인 변화와 반전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이번 총선에서 국민이 박 대통령에게 던진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