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정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고조선사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사료인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은 "연(燕)나라 전성 시기(BC 4~3세기)에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공략하여 장새(障塞)를 쌓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고조선은 요동 바깥의 한반도 서북지방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중국 책 관자(管子)나 전국책(戰國策) 등에는 '예맥' '조선' '요동'이 서로 다른 지역으로 구분되어 나온다. 한편 삼국유사 고조선조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고조선이 평양에 도읍하였다"고 기록했다. 이는 평양 지역의 지역 신앙으로 내려오던 단군 신앙이 고조선 건국과 함께 고조선의 건국신화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대동강 연안에서 고조선 멸망 후에 설치된 낙랑군의 속현(屬縣)인 점제현 신사비(神祠碑)를 비롯하여 낙랑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와 벽돌, 봉니 등이 출토된 것을 근거로 고조선의 중심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이 유력하게 제기됐다. 이를 '대동강 중심설'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학자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 요령성 일대에 집중 분포하는 비파형동검 문화에 주목하였고, 이를 초기 고조선 사람들이 남긴 문화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최근에는 청동기 시대 초기 고조선의 중심지를 서북한 지역이 아니라 요령성 일대로 보고 세형동검을 쓰는 후기 고조선 시기에는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하였다는 주장이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중심지 이동설'이라고 불리는 이 학설은 멸망 당시의 고조선은 낙랑군의 위치를 고려할 때 평양 일대에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초기 중심지는 중국 역사서 위략(魏略)에 나오는 "연(燕)에 서방 2000리를 상실하고 고조선이 위축되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지금 평양보다 훨씬 서쪽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고고학 자료상으로도 요동지방과 한반도 서북지방에는 기원전 8~4세기까지 비파형동검이 분포하고 있고, 기원전 3세기경 비파형동검 문화를 계승하여 나타난 세형동검 문화는 압록강 이북 지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고조선은 시종 일관 요령성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도 전통시대 이래 제기돼 왔다. 그리고 북한학계를 대표하는 리지린은 산해경(山海經) 등 중국 문헌의 고조선 관련 기록을 재해석해서 고대의 요수(遼水)가 북경 근처의 난하(灤河)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난하까지가 중국사의 영역이 되고, 그 동쪽에 있는 대릉하(大凌河)나 요하(遼河)가 고조선의 중심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되었다. '요동 중심설'로 불리는 이 주장은 남한 학계의 '고조선 요서 중심설'의 중요 근거로 다시 인용됐다. 특히 남한 학계의 일부 인사는 고조선 영역이 북경 근처까지 이르렀다고 본다. 그리고 비파형동검을 고조선 사람들이 창안한 것으로 해석해서 동검이 요서 지역에 집중 분포하는 것은 고조선이 요서 지역에 중심지를 두었던 증거라고 주장한다.

중국 요령성 해성시에 있는 석목성 고인돌(왼쪽)과 황해도 은율군의 관산리 고인돌(오른쪽). 두 개의 고임돌을 양쪽에 세우고 그 사이에 막음돌을 놓아 무덤칸을 만든 뒤 뚜껑돌을 올렸다. 이런 탁자식 고인돌은 우리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 형태로 그 분포 지역은 대체로 고조선 영역과 일치한다.

이 학설들의 대립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고조선의 영역을 처음부터 끝까지 대동강 유역으로 한정하거나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대제국으로 그리는 것은 실상과 거리가 있다. 특히 종족의 분포나 비파형동검 문화권을 정치적 영역으로 해석하는 견해는 경계해야 한다. 문헌 기록을 종합하면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동호(東胡)를 치고 동쪽으로 진출하였을 때 요동과 서북한 지역에는 고조선의 예맥족이 살고 있었다. 이는 미송리형 토기와 탁자식 고인돌이 요동에서 서북한 지역에 집중 분포하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후 기원전 4~3세기경 중국 세력의 진출로 고조선의 세력이 위축되어 서북한 지방을 중심으로 국가를 이끌어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공동 기획: 한국고대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