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우모(27)씨는 최근 인터넷에서 인기 있는 조립식 마루 제품을 사기 위해 경기 광명시의 한 대형 가구 매장에 갔다가 허탕을 쳤다. 우씨는 전날 밤 홈페이지에서 150개가 넘는 재고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매장 개점 시간보다 30분 빠른 오전 9시 30분에 도착했다. 하지만 매장 앞에는 이삿짐센터 직원처럼 장갑을 끼고 조끼를 입은 건장한 남성 10여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이들은 우씨가 입장하기도 전에 남아 있는 제품을 싹쓸이해서 대형 카트에 싣고 나갔다. 우씨는 "매장에서 2만9900원인 조립식 마루가 나중에 인터넷 중고 장터에서 3만6000~3만7000원에 팔리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인기 제품을 사재기한 다음 온라인에서 시세보다 비싸게 팔아 돈을 버는 '디지털 허생'이 늘고 있다. 연암 박지원이 쓴 허생전(許生傳)의 주인공 허생은 과일과 말총을 싹쓸이한 후 10배 비싼 가격으로 되파는 '매점매석(買占賣惜)' 수법으로 돈을 벌었다. 디지털 시대의 허생들은 싹쓸이하기 쉬운 소량·한정 판매 제품을 대량 구매한 후 인터넷 블로그나 SNS, 온라인 중고 장터 등에서 웃돈을 받고 되팔고 있다.

디지털 허생들이 눈독 들이는 제품은 식료품이나 의류, 장난감, 가구에 행사 티켓, 대기 순번 표까지 다양하다. 2014년 말 큰 인기를 끈 허니버터칩이 대표적이다. 이 제품은 사재기 열풍이 불면서 정가(1500원)보다 서너 배 높은 가격에 팔렸다. 작년 11월 국내 의류 업체가 프랑스 명품 업체와 협업한 제품을 싸게 팔았을 때도 디지털 허생들이 매장 앞에서 텐트를 치고 노숙하기도 했다. 디지털 허생족(族)인 대학생 홍모(24)씨는 "시중에서 사기 힘든 인기 제품을 인터넷에 올리면 '웃돈을 주고 사겠다'는 사람이 넘친다"며 "사재기를 한 후 비싸게 되팔기를 해서 30~40% 이익 올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말했다.

실수요자인 고객들은 디지털 허생족을 규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판매 업체는 "사재기 고객도 정당하게 물품을 산 소비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다. 일부 업체가 고객 1인당 구매 개수를 정해놓는 등 대책을 내놓았지만, 프로급 허생들은 아르바이트생을 동원해 대응하기도 한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공연이나 행사 티켓 등은 암표로 분류돼 경범죄처벌법으로 처벌할 수 있지만, 일반 물품 사재기는 처벌 근거가 딱히 없다"고 말했다.